[동서남북] 그 대기업 직원들은 왜 청와대 게시판으로 몰려갔을까

이위재 사회정책부 차장 2022. 1.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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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건 참지 않는 세대, ‘공정’이 중요한 키워드
MZ세대가 이끌어갈 미래 변화에 빨리 적응해야

국내 굴지 대기업 전무에게 들은 얘기다. 그 회사 한 상무가 회식 자리가 끝나고 부서 직원들과 같이 차를 타고 갔다. 대리 기사를 불렀다. 그런데 이 임원이 술에 취했는지 같이 탄 후배들을 자꾸 손이나 발로 툭툭 건드렸다고 한다. ‘라떼(나 때)는 말이야’라는 훈계도 곁들였다. 불쾌감으로 충만했던 이 직원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이런저런 정황을 정리해 인사팀에 투서를 넣었다.

사달은 여기서부터다. 인사팀 상급자들은 ‘아니 뭐 이런 걸 갖고…’라면서 넘어가려 했다. 내부에서 알아서 풀라는 사인을 보냈다. ‘내부에서 알아서?’ 가해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피해자는 부글부글 끓고… 이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이 일을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렸다. 회사 이름은 숨겼지만 대충 짐작이 가게 적었다.

인사팀은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이 상무를 바로 보직 해임과 더불어 전보하는 중징계를 내렸다. 그 상무는 결국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 ‘내부 고발자’ 직원들은 이른바 ‘MZ세대’ 1990년대생들이었다.

교육바로세우기운동본부, 정시확대추진학부모모임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조국 딸 의사 국시 합격 관련해 그 과정과 결과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2021년 1월18 일 연합뉴스]

사연을 다 듣자 당시 동석자들은 거의 강호(江湖)의 도의(道義)가 땅에 떨어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엔 회사 문제 풀려고 청와대 게시판까지 동원하느냐’는 한탄이 쌓였다. 그들은 모두 50대였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 상무가 참 안됐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주위 반응을 보면서 ‘시대가 바뀌는 걸 다들 모르고 있구나’ 하는 씁쓸함이 앞섰다. 이 사건은 일부 대기업에서 특이하게 벌어진 소동이 아니다. 앞으로 더 첨예하게 드러날 사회상의 일각이다.

세대를 가르려는 발상에 동의하진 않지만 편의상 ‘MZ세대’가 주류(主流)에 진입하면서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부당한 것은 참지 않는다.” 2019년 한 조사에서 이 세대에게 야근에 대해 물었다. ‘야근을 싫어하겠지’가 애초 전제였다. 그런데 “할 일이 있으면 야근을 해야 한다”는 답변이 53%였다. 이들은 ‘(우리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낙인은 부당하다고 웅변하고 있었다. 단지 야근이 필요 없는데 야근을 강요하는 분위기와 조직 문화는 참지 못하겠다는 의미다. 기업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야근을 둘러싼 갈등 배경에는 이런 인식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MZ세대에 속하는 1990년대생을 해부하겠다는 책과 보고서가 줄을 잇는다.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핵심은 ‘공정’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 공정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주는 대로 성과급을 받지 않고 작년과 왜 차이가 나는지 직급별 기준은 뭔지 회사에 해명을 요구한다. 권력 집단화한 기존 노동조합을 거부하고 새 노조를 직접 만든다. 직장 내 괴롭힘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합당한 처벌을 주장한다. 사실 ‘비정상의 정상화’에 다름없는데 ‘별종’이란 딱지를 붙이니 그들이 더 분통을 터뜨리곤 하는 것이다.

기성세대 처지에서 보면 “왜 자꾸 일을 키워”라는 역정이 날 법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엄연한 현실이다. 기성세대는 위계, 즉 윗 사람이 주는 모욕을 견디면서 살아갔다. 그게 시대 분위기였다. 이젠 시대가 바뀌고 있다. 기성세대가 “쟤들은 왜 저래” 하고 눈치를 줘봤자 그 야유의 유효기간은 얼마 안 남았다. 어차피 미래는 이들 세대 손에 놓여 있다. 이런 변화에 민감하지 않은 조직은 앞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까진 우리 사회 어느 조직이든 이런 변화의 흐름에 절실하지 않아 보인다.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임원 회의 때 마음에 들지 않는 발언이 나오면 “그런 말 한 번만 더 하면 입을 XX버리겠다”면서 좌중을 제압한다고 한다. 이런 CEO가 글로벌 경쟁을 운운하는 기업 조종석에 앉아있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그렇게 위압적으로 지휘해서 나온 성과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까지 세대는 참을 지 몰라도 다음 세대는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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