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 브라보! 인생 2막

김용출 2022. 1. 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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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 같은 하얀 새와 잡초 등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장롱을 사이에 두고, 왼편에는 책과 서류가 가지런히 담긴 서랍장을 배경으로 해서 두툼한 잠바를 입은 할아버지가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두세 권의 책 위에 놓인 노트 같은 것에 몸을 구부려 펜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그가 앉아 있었다.

사진은 옆모습을 담고 있어서 그의 눈이랄까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늘 삶에 진지했고 사람에 따뜻했던 그의 모습이 아련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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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면 다시 해 뜨듯.. 마지막 아닌 힘찬 시작

백로 같은 하얀 새와 잡초 등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장롱을 사이에 두고, 왼편에는 책과 서류가 가지런히 담긴 서랍장을 배경으로 해서 두툼한 잠바를 입은 할아버지가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두세 권의 책 위에 놓인 노트 같은 것에 몸을 구부려 펜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그가 앉아 있었다.

사진은 옆모습을 담고 있어서 그의 눈이랄까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늘 삶에 진지했고 사람에 따뜻했던 그의 모습이 아련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1958년 영암에서 태어난 그는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나주의 사립학교 금성고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매사 진지하고 따뜻했던 그가 어느 국어시간에 애수어린 목소리로 들려주던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김용출 선임기자
신춘문예와 세계문학상 실무로 분주했던 지난해 연말,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편집국 문화부에 도착한 많은 책들 가운데 유독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전남 곡성 대곡리의 96세 농부 이희열씨와 그의 64년 농업일기 이야기를 담은 ‘이희열의 평생일기’(역사만들기)였다. 책 내용도 재미있었거니와, 저자는 바로 열정적으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던, 기자의 고등학교 1학년 은사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은사님의 책은 출판팀 소속 기자들이 모여서 주말 북면에 소개할 7권의 책을 선정하고 필자를 정하는 북회의에 후보에는 올라왔지만 최종적으론 채택되지 못했다. 그래서 신간을 짧게 소개하는 ‘새로나온 책’ 코너에라도 싣기 위해 책과 보도자료를 읽고 기사를 검색하다가 문뜩 인터넷에 걸린 사진 한 컷을 보게 됐다. 거기엔 이희열씨와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옆 모습이 담겨 있었으니.

광주 고려고로 옮겨서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지난해 8월 말 정년퇴직한 이후 광주 석봉도서관에 다니며 씨름한 끝에 이번에 책을 펴낼 수 있었다. 수백 수천 페이지의 글을 읽고 평생 농부 이희열씨를 인터뷰했을 수고가 언뜻언뜻 떠올랐다.

선생님은 수십년 출근하던 버릇이 남아서 요즘에도 아침마다 뒷산으로 출근한다고 한다. 뒷산을 걸으면서 무엇을 보고 생각할까. 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듯 시간도 쉬지 않고 흘러가겠지만, 가끔 잠깐 멈춘 듯한 순간들을 떠올릴 때도 있지 않을까. 정년퇴직하던 날,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늘의 해가 지면 내일의 해가 뜨듯, 이 순간이 마지막이 아닌 힘찬 시작이라 생각하고 이제 새로운 시간표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만 62세라는 만만치 않은 나이에, 올해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이신율리 시인의 인생 열정도 은사 선생님 못지않다. 1959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국악과를 졸업했지만 시가 너무 좋아서 사사도 받고 아카데미도 다니면서 공부한 끝에 이번에 신춘문예 시에 당선됐다. 개별통지 이후 벙거지 모자를 쓴 그를 보니,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절감했다. 꿈이 있기만 하다면, 꿈을 간절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비 내리는 풍경 속에서 사람살이의 모습이 인생론적으로 담긴 그의 당선 시는, 제2의 인생길에 나설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푯대가 될 수도.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비 오는 날의 스페인’ 부문)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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