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수요시위 30돌
[경향신문]
TV 화면에서 할머니들을 본 게 벌써 30년 전이다. 일제강점기, 소녀였던 그들은 일본군에 의해 낯선 땅으로 끌려가 성착취를 당했다. 그러곤 할머니가 되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전쟁은 약자에게, 특히 여성에게 잔혹했다. 전쟁 성폭력에 짓밟히고도 꿋꿋하게 생존해 고통을 증언하는 그들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시민사회가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한 것은 1992년 1월8일 수요일이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오로지 일본 정부의 사과였다. 시위는 손을 에는 추위에도, 발이 젖는 폭우에도 매주 수요일 같은 장소에서 어김없이 열렸다. 서른 돌을 맞은 5일 수요시위까지 모두 1525차례, 단일주제로는 세계 최장기록이다. 경제적 보상만을 바랐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이 되레 손가락질받던 그 시절,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과감하게 알려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나”라며 상처를 용감하게 드러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수요시위가 시작됐고 약 240명이 자신 또한 피해자임을 밝혔다. 위안부 운동은 전쟁 성폭력과 여성인권 차원으로 확장됐으며 이에 공감하는 소녀상이 세계 곳곳에 세워졌다.
강산이 세 번 변했지만 수요시위는 여전하다. 등록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이제 13명뿐이다. 사과하지 않고 버티는 일본 정부는 어쩌면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수요시위도 동력을 잃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지난해부터는 늘 모이던 장소에서도 100m쯤 밀려났다. 극우단체들이 소녀상 앞에 ‘알박기’ 집회신고를 하고 있어서다. 2020년 불거진 정의기억연대의 불투명한 회계·운영 방식을 빌미 삼아 극우단체들은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었다’며 피해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시민단체 문제점은 바로잡고 신뢰도 회복해야 한다. 동시에, 전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평화운동이라는 수요시위의 정신은 이어져야 한다. 축제와도 같을 ‘마지막’ 수요시위가 열리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랄 뿐이다.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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