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맑은 세상 꿈꾸며 기부 나섰던 100년전 민초들

2022. 1. 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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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일제강점기 한겨울 사회적 약자에 기부 릴레이 학교 교육 위해 전재산·토지·건물 등 내놓기도 간도에선 신창호·문익주 등 광한학교 설립나서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지속되는 코로나19 팬덱믹으로 걱정이 앞선다. 돈이 돈을 번다더니 코로나19 기간 전세계 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서로 나누고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만이 희망의 불씨를 살려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함께 나누며 살아갔던 사람들 이야기를 찾아가 본다.

1910년 10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실업가의 미거(美擧; 아름다운 행동)'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백완혁(白完爀), 한상룡(韓相龍), 조진태(趙鎭泰)씨 등 6명이, 고아원 경비의 군졸(窘拙;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어려움)을 개탄하여, 내년도부터는 1명당 정조(正租; 벼) 20석씩을 추렴(出斂)하여 합 120석을 매년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더라."

비슷한 내용의 기사도 눈에 띈다. "경기도 여주군 주내면 상리 최영락(崔永落)은 작년 겨울 추위에 걸인 부랑자 70여명에게 솜옷 한 벌씩을 주고, 음력 작년 12월에도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으로 의지할 곳 없는 40여 호에 대하여, 쌀 한말과 나무 한짐씩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그의 자선심에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더라." (1921년 3월 9일자 매일신보)

요즘의 코로나19처럼 당시에 유행하던 괴질 예방주사를 위한 기부도 있었다. 1920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독도(纛島; 뚝섬) 일대에 다소의 괴질 환자가 발생되어 그 병균이 점점 만연되는 형상이 있음으로, 지금 방역사업에 종사 중이며, 이경래(李慶來)씨가 1백원, 이우명(李愚明) 노근식(盧瑾植) 두 명이 20원, 최경오(崔敬五)씨가 5원 등의 기부가 있었다더라."

산재(産災)를 당한 이를 도운 미담 기사도 눈에 뛴다. 1920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철도원의 미거(美擧)'란 기사다. "용산철도공장에 근무하던 중 기차에 치여서 한쪽 다리를 잃고 어린 동생과 함께 고단한 신세를 수습할 길이 없어 무한 곤란으로 지내는 직공 김범이(金凡伊)를 위하여 그 공장 직공 일동은 현금 235원60전을 모아 지난 14일에 본인에게 전하였다더라."

당시의 기부는 학교를 세우고 유지하는 일에서 많이 이뤄졌다. '오산(五山)학교의 서광'이라는 1920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1907년 12월 24일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이 전 재산을 투자해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세워 조만식(曹晩植) 선생이 교장을 지냈으며 백인제, 한경직, 함석헌, 이중섭 등이 졸업한 오산학교에서 작년 만세소요(3.1운동) 때에 교실이 불에 타고 교사들도 체포를 당한 사람이 많이 있어, 일시동안은 상학(上學)을 중지하였다가 유지 인사 김기종(金起鍾)씨가 1만원을 기부하고, 동교 졸업생 편에서 1만원과 학부형 편에서 1만원을 기부하고 (중략) 조시연(趙始淵)씨는 1만원의 큰 금액을 기부하고, 이계련(李啓璉)씨도 3천원을 기부하여 오는 4일부터는 한층 새로운 면목으로 개학한다더라."

1921년 1월 11일자 매일신보에도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다. "전북 김제군 금구면 청운리의 송씨 문중에서 지금의 사회 풍조에 비추어 자제 교육의 급무(急務)됨을 자각하고, 과반 종족(宗族) 일동이 회집 협의하여 청운리에 사립 청운의숙을 설립하기로 결정한 후, 종중 소유의 토지 건물(가격 4천여원)을 기부한 외에, 송선규(宋先奎), 송재만(宋在萬), 송재면(宋在冕) 3명이 각 100원씩을 필두로 기부금을 쟁선(爭先; 앞 다투어) 의연(義捐)하며, 기타 인근 마을 유지들로부터도 다대한 찬동을 얻어 모집된 기본금이 이미 약 2천원에 달하였고, 생도의 지원자도 이미 80여명의 다수에 이르렀으므로, 송씨 종중의 강단을 임시교실로 충용(充用; 보충해 씀)하고, 3명의 교원을 청빙(請聘; 초빙)하여, 지금 열심히 교수 중인데, 성적이 자못 우량하여 점차 발전의 서광이 있으며, 장래 교무(校務; 학교 사무)를 일층 대대적으로 확장할 계획이라더라."

학교에 대한 기부 기사는 계속 이어진다. "경기도 고양군 중면(中面) 일산에는 아직 보통학교가 없어 유감이던 바 2~3년 전부터 이강훈(李康薰), 이현의(李賢儀) 등 몇명이 공립보통학교 설립을 발기하여 일반에게 걷은 건축비 1만원이 거의 다 완납되었음으로 곧 학교를 짓고자 하였으나 학교 터가 얼른 결정되지 못하여 끌어오더니 중면 면장(面長) 이윤의(李允儀)씨는 자기의 소유 토지 1천평을 기부하고 나머지 3천평은 철도용지여서 만철(滿鐵; 남만주 철도)과 교섭 중이므로 내년 1학기부터는 개학이 되리라더라. (1923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기부는 국내 뿐 아니라 간도에 있는 학교에서도 많이 일어났다. 1909년 6월 9일자 신한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압록강 건너서 간도 땅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시세(時勢; 당시의 형세)의 변천(變遷)함과 나라의 위태함을 크게 근심하고, 동심(同心) 합력(合力)하여 광한학교를 설립하고, 신창호, 문익주씨가 300~400원을 연조(捐助; 재물을 기부하여 돕다)하여 장취(將就; 앞으로 진보하여 나감)할 여망(輿望; 기대)이 많다 하니, 여러분의 뜻있는 사업은 감사한 일이더라."

미국에서도 그런 일은 있었다. 1909년 9월 1일자 신한민보 기사다. "으래들랜드 학생 조명진씨가 하기 방학동안에 학자(學資; 학비)를 예비하고자 하여, 네바다 주 노간 지방에 있는 동포의 참외 농장으로 갔더니, 마침 일이 다 끝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므로, 뜻있는 동포 김두호씨는 25원, 장봉석씨는 5원을 각각 연조하고, 학업을 성취하여 조국에 대한 의무를 곡진(曲盡; 정성이 지극하다)하기를 신신 권유하였다니, 두 분의 고상한 의거는 치하하기를 말지 않노라."

특이한 기부도 있었다. "경성 내의 각 유지, 명사가 1월 15일을 기약하여 해동관에서 성대한 신년 연회를 개최한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각 기생 권번에서 특히 가무에 출중한 기생 수십명을 선택하여, 당일 연회에 기부하여 일반 하객에게 만족한 흥을 돕게 하기로 작정하였다더라." (1921년 1월 14일자 매일신보)

1921년 3월 25일자 매일신보에도 '금세(今世)의 대 독지가(篤志家)'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황해도 안악군의 안택서(安宅瑞)씨는 50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던 전날에 장남을 불러 동네에 있는 사립 안신(安新)학교에 재산의 전부의 반인 토지 16만3000여평을 기부하고자 하는데, 내가 죽은 뒤에 혹시 무슨 분쟁이 있어서는 좋지 못한 것이니, 장남에게 승인하는 증서를 써놓으라고 한 후 그 이튿날에 이 세상을 떠나서 멀리 황천의 길을 밟게 되었다.이에 기부를 받은 안신학교의 전승근(田承根) 교장은 '어찌 하였던지 돌아가신 큰 은인이 지하에서라도 기쁜 웃음을 웃고 계시도록 내 평생을 이 학교에 바치어 어디까지든지 완전한 방침과 경영으로 학교의 번창을 도모(圖謀)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대다수가 어렵게 살던 100년 전에도 사회의 틈새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잘 살게됐지만 오히려 기부는 100년 전만 못한 듯하다. 경제는 선진국인데 기부는 후진국이다. 기부는 습관이다. 내 처지도 어렵고, 워낙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기부를 계속해서 미루다보면 결국은 할 수 없게 된다. 일단 해보시라. 그러면 희망이 찾아올 것이고 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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