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의 재판청구권 보장을 위해

한겨레 2022. 1. 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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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소송의 소송비용 제도 바꿔야

[왜냐면] 박호균 | 변호사·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 대표

2014년 전남 신안군 신의도 ‘염전노예 사건’ 피해 장애인들이 언론과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섬을 탈출한 뒤, 이듬해 공익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와 지자체가 보호의무 등을 다하지 않았다”며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피해 장애인들은 패소하였고, 이후 소송비용 확정 재판에서 신안군청은 자신들의 변호사 수임료를 피해 장애인들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법원 결정을 얻어냈다. 국가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들에게 혼을 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 소송은 공익적인 측면이 강한 소송이었다. 이 밖에도 그동안 90년대 수재 집단 손해배상 청구소송, 호주제 위헌소송, 장애인 보험차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다양한 유형의 공익소송이 있었고, 이들 소송을 통한 문제제기는 우리 사회의 발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새해 들어서도 행정법원은 정부의 방역패스 정책과 관련해 학부모단체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집행정지(효력정지) 신청을 일부 인용했는데, 이 소송은 최종 승패를 떠나 방역이라는 공익과 기본권 보장이라는 두가지 가치를 조율하고, 우리 사회가 코로나 난국을 극복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소송에서 패소하였을 때 적잖은 소송비용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애초에 변호사 보수 각자 부담 원칙(자신이 지출한 변호사 보수는 스스로 부담하는 방식)을 유지해오다 1981년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소송촉진법) 제정과 1990년 민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패소자가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소송 남발을 방지할 목적으로 도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위 염전노예 사건처럼 지자체나 국가에 대해 부당함을 호소하는 소송, 보험계약자들이 제기하는 보험금 소송, 교통사고 후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손해배상소송, 의료사고 피해 환자들이 제기하는 의료소송, 다수의 환경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환경소송 등은 남소로 보기 어려운 소송인데도, 우리 법제는 일률적으로 패소자 부담 원칙을 강제함으로써, 순기능을 하는 공익소송을 위축시키고 사실상 재판청구권을 행사한 것에 대한 과도한 제재를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나 집단, 기업, 국가나 지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경제적 약자인 소시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만큼 가난하면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국가나 대기업이 혼내줄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참고 지내라는 것이다.

변호사 보수 각자 부담 원칙은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재판청구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모방한 일본 민사소송법은 여전히 각자 부담 원칙을 따르고 있고 미국도 그렇다.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우리와 유사하게 패소자 부담주의를 취하면서도 변호사 보수 법정화, 법률보험, 보호적 비용명령, 각자 부담 예외 인정 등을 통해 공익소송을 위축시키거나 재판청구권을 과도하게 제약하는 불합리를 보완하고 있다.

무릇 소송촉진법이 만들어진 1981년 무렵의 우리나라는 군사정권의 독재정치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당시 일부 대기업들은 이들 군사정권과 함께 성장했다. 군사정부나 대기업으로서는 소송을 통한 일반 시민의 문제제기를 제한하고자 했을 테고, 이에 나타난 도구적 개념이 ‘남소의 폐해를 방지해야 한다’는 구호였을 것으로 보인다. 민사소송법 개정이 이뤄진 것도 군사정부 시기였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우리 헌법의 핵심적인 원리이고,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 즉 재판청구권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평등권과 같은 개별 기본권의 실효적 보장을 위해 필요한 기본권으로서 법치국가의 초석이다. 억울한 상황에서 재판청구권의 과도한 제한이나 침해를 허용한다면, 개별 기본권은 명목상의 권리에 불과한 상황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순기능을 하여온 공익소송이나 사회적, 경제적 약자가 제기하는 소송, 증명의 부담이 큰 전문가 소송 등에서 남소 방지 목적보다 더 중요한 재판청구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민사소송법 등의 관련 법률을 개정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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