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대상] 생지옥에서 피는 희망꽃 (상) / 강인석

한겨레 2022. 1. 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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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2021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대상
2017년 3월2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로 노동자들이 출근하고 있다. 거제/연합뉴스

캄캄한 동굴에 전등 몇 개 켜놓은 듯 어두침침한 탱크는 그 자체가 사람을 주눅들게 했다. 높이 20~30m를 좁은 계단이나 수직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당시 몸무게가 82㎏이었으니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초보인 나에게는 매우 힘들었다. 하루, 이틀, 사흘째 되는 날 ‘아,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배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생사를 오가는 일이었다.

강인석 |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2018년 3월2일.

이날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난 특별한 날이다. 쉰세 살에 가족을 두고 홀로 거제로 간다는 것도,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옷 몇 벌과 이불 한 채를 보따리에 싸서 거제로 왔다.

2018년은 조선업의 위기가 본격화되던 때였기에 조선소에 취업하는 것 자체가 그리 쉽지 않았고, 더욱이 나처럼 초보인 경우에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4개월 동안 거제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취업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이 막연한 기다림이 이어지던 7월, 건강검진을 받고 대기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뻤다. 또다시 대기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8월22일, 안전교육 날이 잡혔다. 200여 명이 함께 안전교육을 받았다. 8시간 교육 후 드디어 조선소에 들어가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다음 날 8월23일 첫 출근. 두꺼운 안전 관련 책을 한 권 던져주더니 읽으란다. ‘이 책을 다 읽으라고? 설명도 없이?’ 산업 안전과 관련된 책이었다. 홀로 탈의실에서 뒤적거리다 오후엔 견학한다고 하여 배에 올랐다. 안전관리자와 함께 올라간 배는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배에서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는데, 좌현, 우현, 선수, 선미를 알게 되었다. 이것만 알면 된다는 이야기에 진짜 그런 줄 알았다. 뒤에 알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저렇게 생긴 게 코끼리라는 동물이야’ 정도였다. 들어오면서 가졌던 기대감, 설렘은 그다음 날부터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내가 배치된 직종은 도장부였다. 일을 소개해준 동생이 “물만 푸면 되니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도장부는 전처리(일명 파워), 터치업(T/UP), 스프레이 등 3개 직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 터치업을 하게 됐다. 터치업은 붓과 롤러를 사용하여 손으로 하는 도장을 말한다. 깡통(페인트를 섞는 약 4리터짜리 용기), 롤러, 인치붓, 끌칼, 스크레이퍼, 보루, 안전벨트, 보안경, 안전모, 귀마개, 빗자루, 작업복(도장용), 방독마스크, 승선증, 작업증, 플래시 등을 챙겨서 승선하였다. 16가지 준비물을 꼼꼼히 챙겨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조선소는 반 단위가 최소 작업단위이자 관리단위인데 내가 속하게 된 반은 10여 명이 한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민체조와 조회를 끝내고 첫날 작업이 시작되었다. 첫날이니 모든 작업 도구를 두고 따라와서 구경만 하라고 하길래 긴장과 불안감을 안고 들어간 탱크. 캄캄한 동굴에 전등 몇 개 켜놓은 듯 어두침침한 탱크는 그 자체가 사람을 주눅들게 했다. 높이 20~30m를 좁은 계단이나 수직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당시 몸무게가 82㎏이었으니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초보인 나에게는 매우 힘들었다. 하루, 이틀, 사흘째 되는 날 ‘아,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배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생사를 오가는 일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결심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살부터 빼야 했다. 하루 한 끼만 먹었다. 아침 거르고, 점심 먹고, 저녁에는 탄수화물을 끊었다. 그렇게 4개월 동안 17㎏을 빼 65㎏이 되었다. 몸이 가벼워지는 동안 조선소에 필사적으로 적응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페인트 희석부터 터치업 하는 방법, 에어호스(도장 뒤 건조를 위해선 공기가 필요하다) 설치 방법 등 도장에 필요한 실무 기술을 익혀갔다.

문제는 고소공포증이었다. 극심한 고소공포증으로 운전하면서도 다리를 통과할 때면 시속 120㎞로 달릴 정도였다. 빨리 지나가야 하니까. 보통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길이는 300m, 높이가 30m 정도이니 얼마나 무서웠는지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어느 날 갑판에서 지상 안벽으로 통에어호스(25m)를 연결해서 두세 개 내리는 일이 있었다. 안벽에 있는 동료는 “형님, 빨리 안 내리고 뭐 하는교?”라며 고함을 치며 닦달했다. 후들후들 떨면서 내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또 어떤 날은 탱크 안에서 길을 잃어 30분 동안 동료 노동자들을 찾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헤매기도 했다.

일당 10만5000원을 받다가 4개월 뒤에 11만5000원으로 올려 받았다. 반원들이 일당을 올려달라고 반장한테 이야기해준 모양이었다. 4개월 만에 에이(A)급 일당을 받게 된 것이다. 죽을 각오로 일한 덕분에 반원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반원들은 거의 15년 이상 도장공으로 일해왔는데 임금이 같았다. 조선소 임금이라는 것이 경력도, 기술 능력도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일당 얼마’로 임금을 책정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조선소에서 몇 달 일하면서 서서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조선소 노동자는 왜 이렇게 저임금으로 일을 할까?’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주최한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대상 수상작입니다. 중편은 다음주에 실립니다. 수상작 일부를 해마다 <한겨레>에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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