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정치'와 인류 정체성

한겨레 2022. 1. 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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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2019년 8월15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기억과 미래] 정병호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혹시 오는 길에 아시아인 혐오를 당하지 않았나요?” 지난달 미국에서 만난 사람이 물었다. 충돌은 면했지만 사실 나도 겪었다. 혼자 운전하고 가다가 고속도로변 작은 식당에 들어가니 종업원과 손님들 모두 백인이었다.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차이나 바이러스”라고 한, 트럼프를 지지했던 동네임이 분명했다. 중국인처럼 보이는 나를 바이러스처럼 보는 저들 앞에서 ‘마스크를 계속 쓸까? 벗을까?’ 불편했지만 등을 돌려 나가기도 어색해서 그냥 들어가 주문을 했다. 음식이 나와서 먹기 시작할 때 건장한 중년 남자가 내 테이블 앞으로 와 우뚝 서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여기 뭐 하러 왔어?”

내가 남자고 나이도 먹었고 체구도 크고 영어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근처 대학을 다닌 것이 다행이었다. 아직은 그랬다. 그러나 혐오정치의 속성상 그 모든 것이 소용없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미 미국 여러 지역에서 아시아계 여성, 노인, 어린이들이 불안하게 살고 있다. 난데없이 욕하고, 얼굴에 침을 뱉거나, 폭행을 하기도 한다. 애틀랜타에서는 한국계 여성들이 총격으로 죽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산책하던 타이계 할머니가 떠밀려 죽었다.

사람들은 불안할 때 취약한 집단을 비난하고 희생양으로 삼는다. 두려움이 커질수록 혐오집단을 만들고 낙인을 찍는다. 같은 민족끼리도 약한 집단을 따돌리고 구박하기도 한다. 코로나 초기에 조선족 간병인 아주머니는 자신을 ‘바이러스’ 취급하는 사람들의 눈총이 무서워서 마스크를 두겹씩 쓰고 죽은 듯이 지냈다고 한다.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나오자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공공연하게 터져 나왔다.

소수자 차별의 원리는 같다. 인종과 민족뿐만 아니라 지역 나이 성별 종교 장애 등 모든 차이를 차별의 빌미로 삼을 수 있다. 잠재된 편견에 불을 질러 소수집단에 대한 증오로 변화시키고 그들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고 승인하는 것이 혐오정치의 특징이다.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히틀러가 대표적 사례이지만, 트럼프나 아베 같은 민주국가 정치가들도 주류 집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차별 감정을 동원하기도 한다.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밖에 없다.ㅋㅋ” 한국의 한 혐중사이트에 올라온 글이다. 수천개의 ‘좋아요’가 달렸다. 그래서인지 “한국 청년들은 중국을 싫어한다”는 정치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중국인들과의 교류와 협력은 수많은 한국 사람들의 생계가 걸린 일이다.

“한국인 죽여라!” 일본의 혐한사이트에 올라온 글이다. 지난여름, 한 일본 청년이 재일동포들의 우토로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렇다고 ‘일본 청년들이 한국을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 정치가와 미디어의 혐한발언 속에서도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은 ‘코리아타운’에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류 음악과 드라마를 즐기고 있다. 동아시아 사람들의 일상은 이미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코로나 위기는 인류가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바이러스는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불평등한 백신 분배 문제 등으로 바이러스 변이는 계속되고 있다. 기후변화나 코로나 같은 지구적 문제에는 인류적 대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지도자들은 국가별 집단별 대응에 매달리고 있다. 오히려 대중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소수집단 혐오를 조장하기도 한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복과 지배의 리더십이 아니라 협력과 상생의 리더십이다. 좁은 지역, 이념, 계층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양한 생명이 어울려 살 만한 곳으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유목민 사회에는 여행자와 조난자를 환대하는 문화가 있다. 누구나 객지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마주친 낯선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내일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일이다. 글로벌 재난과 이주의 시대에 인류가 체득해야 할 생존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남을 구별하는 경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자신과 다르다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어떠한 행위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선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법규를 정하고, 그 원칙을 폭넓게 교육해야 한다. 학교 교육만이 아니라 미디어, 드라마, 게임까지 다양한 문화 역량을 모아서 함께 노력해야 할 과제다. 작은 ‘우리’를 넘어 큰 ‘우리’로.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실천하는 첫해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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