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의 '풍운아' 조성민 벌써 9주기.. 스타들 즐비 '92학번'들 뭐하나

2022. 1. 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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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장윤호 기자]한국야구 역사에서 조성민은 ‘풍운아’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저버린 날이 2013년 1월6일로 올해로 9주기가 된다. 아직도 그를 영원히 떠나보내지 못하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발길이 경기도 성남 추모 공원으로 향한다.

1973년생인 조성민의 '92학번' 동기생들은 한국 야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194cm 장신에서 내리 꽂히는 시속 150km의 포심 패스트볼은 늘 상대 타자를 압도했다. 당시 서울에는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트로이카가 있었고 박찬호와 정민철, 최원호, 손혁 등이 경쟁을 펼치는 구도였다.

이 가운데 공주고 출신으로 한양대에 진학한 박찬호가 1994년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빅 리그 개척자가 됐다.

그들의 고교 3년 시절 미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 조성민 임선동 박찬호가 모두 참가해 국제무대에 실력을 알렸고 후일 이 대회가 해외 리그 진출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국제 스카우트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박찬호가 한양대를 2학년으로 중퇴하고 1994년 계약금 120만달러(약 13억원)에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먼저 빅 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자신이 최고라는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조성민은 고려대를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1995년 말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다. 계약금이 1억5000만 엔으로 박찬호와 비슷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계약 기간이 8년으로 길었던 것이 후일 그의 야구에 멈춤을 가져왔다.

조성민은 일본야구의 전설인 나가시마 시게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1996년 첫 해를 2군에서 준비를 했는데 고교, 대학을 거치며 혹사당한 팔에 문제가 됐다.

1997년 7월5일 한신 타이거즈전 8회말 구원 등판이 일본프로야구(NPB) 데뷔전이었다. 그해 1승(구원) 11세이브, 평균 자책점 2.89로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선발로 완투 능력까지 선보였다. 전반기 7승으로 올스타에 선발됐다.
1998년은 메이저리그에서 LA 다저스 선발 박찬호, NPB 요미우리 조성민, 그리고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선동열이 국제 무대의 트로이카로 한국야구의 꽃을 피운 해이다.

그러나 조성민은 1998년 후반기에 오른 팔꿈치 부상이 찾아 와 결국 1999년 초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갔다.

그는 재활 기간 중인 2000년 최고의 인기 스타 최진실과 결혼하고 복귀를 준비했으나 결국 2002년 10월 요미우리를 퇴단하고 한국 프로야구 데뷔를 추진했다.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2005년 당시 한화 김인식 감독의 도움으로 한화에서 3년간 불펜 투수로 뛰고 은퇴했다.

은퇴후 사업을 하면서 야구 후배들을 위한 강연 등 봉사 활동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조성민은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1승10패11세이브, 평균 자책점 2.84, KBO리그 한화 이글스에서 3승4패, 평균 자책점 5.09를 기록했다.

풍운아이자 비운의 투수로 생을 마감한 그는 아꼈던 팬들, 야구 동기생 선후배들의 기억에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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