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2022. 1.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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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성규

# 예전엔 으레 연말연시에 연하장을 주고받았지만 요즘엔 대개 SNS로 사진과 덕담을 주고받는다. 나 역시 하늘 아래 오밀조밀하게 집들이 모여있는 황영성 화백의 그림을 캡처해 그 위에 계절 인사를 담아 보내며 “새해엔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볕이 좀 들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런데 어느 분 답장을 받아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지난 한 해, 참으로 정직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절망이 꼭 희망일 것으로 믿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정직한 절망’이란 구절에 마음이 꽂혔다. 그리고 공감했다. 그 정직한 절망이야말로 또 다른 희망의 씨앗이자 시작일 것이기에!

# 지난해 마지막 날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과 함께 강남의 뱅뱅사거리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계산대에 서 있던 주인이 계산을 마치며 오늘로 영업을 끝낸다면서 죄송하다고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점심 식사 내내 김 전 장관이 울분에 차 토해내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 진단을 듣고 난 직후였기도 했지만 식당 주인의 나지막한 ‘폐업 고지’는 그 어떤 미래 진단의 웅변보다도 무겁게 다가왔다. 겉보기엔 여전히 손님도 있고 꽤 목 좋은 곳에 위치한 식당이라 주인의 ‘폐업 선언’이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주인은 그동안 누적된 적자 탓에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며 되레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신 되뇌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정직한 절망’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1월 1일 서울 송파구 잠실역 부근 복권판매점 앞에 시민들이 복권을 사기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연합뉴스

# 새해 첫날 연합뉴스가 찍어 올린 두 장의 사진이 담긴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두 사진 모두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말 그대로 장사진(長蛇陣)을 치듯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줄을 이어간 모습이었다. 하나는 서울 송파구 지하철 2‧8호선 잠실역 부근 한 복권 판매점에서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장면이었는데 줄이 너무 길어 정작 복권 판매점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곳은 작년 말까지 로또 복권 1등 당첨자가 15번, 2등 당첨자가 62번 나와 이른바 ‘로또 명당’으로 불리는 곳이기도 했단다. 또 다른 사진 역시 서울 강북의 노원구 로또 명당으로 알려진 복권 판매점에 닿기 위한, 끝이 안 보이는 긴 기다림의 줄을 담고 있었다. 로또 명당을 찾는 발길은 새해를 맞아 로또 대박이라도 맞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우러난 희망의 발걸음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그 자체가 되레 ‘정직한 절망’의 뒤안길이 아닐까 싶었다. 더 이상 어찌할 도리 없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벽 같은 현생에 절망한 이들의 반사적인 행동의 발걸음이자 줄 서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정말이지 새해 벽두의 그 긴 줄 서기는 그 자체로 ‘정직한 절망’의 줄 서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새해를 맞아 둘째 날에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애초 계획은 반가사유상 두 점이 놓여있는 ‘사유의 방’을 가보려던 것이었지만 막상 이른 아침인데도 코로나도 아랑곳 않는 긴 줄의 인파에 놀라 방향을 틀어 관람객이 상대적으로 적은 ‘조선의 승려 장인’ 기획전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전시를 보다 불상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합장한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치 기독교식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포개어 모은 듯한 비로자나여래좌상의 자태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꼭 400년 전인 1622년 광해군 14년에 광해군의 비인 장렬왕후(훗날 폐비 류씨)가 발원하고 현진(玄眞)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승려 장인 십수 명이 합력하여 만든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이었다. 뭔가를 간절히 희구하는 모습이어서 더 마음에 다가온 이 불상을 발원한 장렬왕후(章烈王后)는 인조의 계비로 장희빈을 궁궐로 불러들인 그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아니다! 광해군의 비 장렬왕후는 불상이 조성된 이듬해인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된 후 폐위돼 7개월여 만에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 불행한 기운을 느낀 탓이었을까?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며 기도하듯 고개를 숙인 채 눈마저 지그시 감은 이 불상을 마주하며 불현듯 ‘정직한 절망’이 화두처럼 떠올랐다. 어쩌면 이 불상을 발원할 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불상은 왕실 여인들의 말년 궐 밖 출가 수행처인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불상 열한 구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남편 광해군에게 이미 불안과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봤기에 스스로 출가해서 말년을 보낼지도 모를 궐 밖 왕실 여인들의 출가 수행처인 두 절에 불상 열한 구를 제작해 봉안하도록 했을지 모른다. 장렬왕후가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예민하게 감지했을 절망과 절벽 같은 심정을 발원하고, 십수 명의 승려 출신 장인들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불상이었기에 거기엔 다름 아닌 한 여인의 ‘정직한 절망’의 기운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다시 내세의 생(生)과 희망으로 승화시키려는 승려 장인들의 고뇌에 찬 절실한 기도의 용력이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그중 한 구인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의 다소 특이한 자태를 보면서 나 역시 그 기운, 즉 ‘정직한 절망’에 감응했던 것이리라.

# 새해 벽두에는 대개 희망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절망을 이야기한다. 그냥 절망이 아닌 ‘정직한 절망’이다. 그 까닭은 오로지 정직한 절망만이 희망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올해는 대선과 지방선거가 거의 동시에 치러지는 해다. 하지만 정권 교체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연말과 연시를 지나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을 만큼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의 처참한 상황이다. 개선이든, 개편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보다 근원적인 ‘정직한 절망’이 있은 연후에나 ‘새로운 희망’도 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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