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저는 그런 하느님 믿지 않습니다" 김하종 신부의 기도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2. 1.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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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주말> 김하종 신부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엊그제 밤에 페이스북을 뒤적이다가 김하종 신부님의 글을 읽고 잠시 놀랐습니다. 아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이탈리아 출신인 김 신부님은 경기 성남 ‘안나의 집’에서 20년 넘게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분입니다. 저도 여러 번 인터뷰했고, 신문 방송에도 많이 등장하셨지요. 만해대상, 호암상 등 상도 많이 받으셨는데, 상 받는 걸 좋아하십니다. ‘안나의 집’ 운영에 도움이 되니까요. 지난 연말엔 자전 에세이 ‘사랑이 밥 먹여준다’를 통해 왜 가난한 이를 위한 신부가 됐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했지요.

김 신부님의 페이스북을 읽는 것은 즐겁습니다. 항상 ‘오늘은 무슨 반찬을 준비했고, 어떤 봉사자들이 참여했다’는 내용이 흐뭇하거든요. 그런데 엊그제 신부님 페이스북 글은 여느 때와 좀 달랐습니다. 제목부터 “나는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습니다”로 시작하는 장문(長文)이었습니다. 사제가 “안 믿는다”니, 좀 놀라웠습니다. 문단별로 영문과 한글 번역이 나란히 쓰여있는데 200자 원고지로 계산하면 무려 45장 가까이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읽기 시작했지만 단숨에 다 읽게 되더군요. 그리고 낯선 땅 한국에 와서 이름까지 김하종으로 바꾸고 시신과 장기기증 서약까지 하며 문자 그대로 한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김 신부님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김하종 신부는 배식 때마다 손하트를 그리며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를 외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다"고 말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 문장씩 읽다보니 ‘믿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 표현이었습니다. 신부님 글은 “책에서 만난 하느님을 저는 믿지 않는습니다. 저는 안나의 집에서 본 이들의 삶에서 만난 하느님을 믿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내용도 ‘안 믿는다’ ‘믿는다’의 대구(對句)로 이어집니다. 이런 식이지요. “믿지 않습니다. 저 먼 곳에 계시는 철학적인 하느님을” 이어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연약한 아들이 되신 아버지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이 저를 만나기 위해 어린 소녀의 여리고 섬세한 자궁을 택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구절도 있더군요. “저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기도를 미신처럼 읊조리고, 더 나아가 제 간청을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봉헌을 요구하기까지 하면서 손쉬운 힐링과 축복을 줌으로써 행복과 건강을 마술처럼 가져다주는 그런 하느님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기도란, 아들과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 사이의 대화를 신뢰하는 단순한 행위임을 가르쳐 주신 그런 하느님을 저는 믿습니다.”

또 “저는 우리 인류의 드라마틱한 이벤트들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시는, 무감각하고 덤덤한 그런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연민과 자비 가득한 하느님을 믿습니다. 손바닥에 저의 이름을 적어두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극심한 고통을 보시고는 그분 스스로 고통스럽게 되시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마지막 비극적 순간인 ‘죽음’까지도 함께하시는, 그런 하느님을 저는 믿습니다.”

김하종 신부가 작년 연말 펴낸 자전 에세이 '사랑이 밥 먹여준다'. /마음산책

자, 이제 김하종 신부님이 기도하는 주제가 느껴지시지요? 저 역시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일종의 불경(?)스런 표현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이 좀 풀리는 듯했습니다. 이 기도문(저는 기도문이라고 느꼈습니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과거에 여러 번 하느님을 궁극적인 현실로 축소시켰습니다.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사고하고 설명하면서. 연구와 이해의 대상인 신학적이고 도덕적 차원으로 말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신나는, 자유와 기쁨의 경험이라는 것을. 제가 만난 그분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상호 호혜성(상호성)과 책임감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 그 관계 속에 그분은 저에게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협력하자고 요청하십니다. 사랑이라는 바탕 위에 세워진 그런 세상을, 그분은 진정 살아있는 경험이시며 나같이 하찮은 존재의 삶의 매 순간의 파편마다 살아계신 분입니다.”

요컨대 김하종 신부님의 이 기도문은 ‘지금 여기’에 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제가 뵙는 대부분의 종교인들의 말씀은 결국 ‘지금, 여기’로 모아지곤 합니다. 각 종교의 경전을 읽으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2000년 전, 2500년 전 종교 창시자로부터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았기에 그 긴 세월을 이어 종교가 생존할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결국 2500년, 2000년 동안 좋은 가르침을 ‘지금, 여기’에서 매번 다시 보여준 분들 덕분 아닐까 합니다. 제가 김 신부님의 기도문 혹은 신앙고백에서 느낀 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좋은 기억’의 릴레이랄까요.

평소와 결이 다른 글을 쓰신 김 신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30년을 한국에 사셔도 여전히 한국어가 능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외국어로는 거짓말 못 한다는 말 말입니다. 김 신부님은 “저는 길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기들의 눈동자에서, 노숙자들의 눈동자에서, 식사하러 오신 할머니의 눈동자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맨날 만납니다. 생활 안에서, 길에서 만납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김 신부님이 이 글을 쓰신 것은 2년 전이랍니다. 제가 “12월 28일자 페이스북에 쓰셨던데, 연말이라서 쓰셨나요?”라고 여쭸더니, “페이스북이 ‘2년 전에 쓴 글’이라며 알려줬어요. 지금 제 생각과도 다르지 않아서 다시 올렸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김 신부님 페이스북 원문 게시글과 링크를 붙이겠습니다. 좀 길지만 시간 나실 때 한번쯤 음미해보실만 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새 마음을 먹는 연초이니까요.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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