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5%보다 좌절한 95%를 봅니다"

안승호 선임기자 2022. 1. 4.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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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명문 덕수고 정윤진 감독

[경향신문]

정윤진 덕수고 야구부 감독이 지난달 21일 인터뷰를 마친 뒤 야구부 클럽하우스에서 배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코치·감독으로 28년, 우승만 14번
투구 회전수 연구 ‘석사 감독님’
“하고자 하는 자기 동기 가장 중요
프로 입단이 행복 보장하진 않아
학생들과 대화하며 늘 진로 고민
주말리그 학습 위한 순수 경기로”

고교야구 스토브리그도 프로야구처럼 치열하다. 덕수고 정윤진 감독(51)은 두 해 전 경기지역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수원 매향중 3학년 선수를 과감하게 스카우트했다. 그 선수는 중학교 시절에도 시속 140㎞에 근접하는 빠른 공을 던졌지만 제구가 엉망이었다. 경기지역 주요 고교가 그를 외면하는 사이 정 감독이 그 틈을 파고들어 덕수고로 스카우트해왔다. 그는 이미 고교 최대어가 된 심준석(덕수고 2학년)이다.

고교 야구감독으로 우승만 14번. 역대 최다 우승 기록에 대통령배와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에 협회장기 및 전국체전까지 모두 석권한 사상 최초의 감독 타이틀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다.

정윤진 감독은 지난달 21일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덕수고에서만 코치·감독으로 28년간 보낸 지도자 생활을 돌아봤다. 2007년 이후 감독만 15시즌을 보낸 그는 시대를 앞서간 지도자이기도 했다. 정 감독은 ‘고교야구 선수의 볼 스피드와 최대 롱 토스, 운동학적 변인과의 상관 연구’를 주제로 2008년 한양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에는 당시론 다소 낯선 개념이던 투구 회전수에 대한 얘기까지 담겨 있다. 이는 정 감독이 투수의 성장 가능성을 읽는 자료 중 하나였다.

정 감독은 “당시 30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고, 결과적으로 회전력 좋은 투수들이 롱 토스가 좋고, 결국 스피드까지 따라붙는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했다.

정 감독은 회전수가 유난히 좋아보였던 심준석을 데려와서는 3개월 동안 아예 피칭을 시키지 않았다. “10m 거리에서 네트에 대고 반복적으로 공만 던지게 해 하체 릴리스 동작을 익히게 했다. 피칭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누르고 밸런스 잡는 데만 집중해서 시켰는데 결국 기대대로 제구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지도법도 많이 달라졌다. 잘못한 것을 바로잡자면 대화부터 시작한다. 정 감독은 “대화를 무조건 많이 해야 한다. 그럼에도 선수가 열심히 할 의사를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운동을 시키지 않는 게 낫다. 그럴 때는 일찍 귀가시킨다”며 “하고자 하는 자기 동기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억지로 끌고 가서는 안 되고, 갈 수도 없다”고 말했다.

덕수고 감독으로 2021 봉황대기 우승을 포함해 14차례나 우승한 이력 중 기장 기억에 남는 건 2012~2014년 사이의 청룡기 3연패라고 한다. 고교야구 3연패 역시 사상 첫 기록이었다. 매년 전력이 달라지는 고교야구에서 3연패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정 감독은 “엄상백(KT), 김재성(삼성)이 1학년부터 3년 연속 우승을 했다. 그때는 대통령배에서도 3연패를 할 수 있었는데 임찬규(LG)가 있던 휘문고와의 결승전에서 연장 가서 진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정 감독은 인터뷰 내내 지난 성과보다는 교육자로, 또 진학 지도자로 바라보는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덕수고는 올해 하혜성과 한태양(이상 롯데) 등 프로로 2명을 보냈다. 또 수시전형을 통해 이서준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시키기도 했다. 엘리트 고교야구 선수의 서울대 진학은 역대 3번째였다.

정 감독은 “여러 선수가 프로에 지명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여러 학생들이 대학에 잘 진학하는 게 제게는 더 큰 바람”이라고 했다. 정 감독은 현실적인 얘기를 했다. 해마다 프로 지명 선수를 다수 배출하는 것은 눈앞의 성과지만, 그것이 학생들의 행복을 가져다는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 감독은 “야구를 시작해서 20~30년이 지나서도 야구 관련 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5% 미만”이라며 “프로·아마 감독과 스카우트, 에이전트 또는 야구 관련 아카데미를 통틀어도 그 정도 수치에 불과하다”고 했다.

정 감독은 고교 진학 과정에서 일종의 ‘필터링’과 제도 개선을 부탁했다. 우선은 운동을 계속할 학생과 그렇지 않을 학생의 구분을 중학교 3학년 때는 해주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했다. 이에 정 감독은 “신입생이 오면 운동능력뿐 아니라 내신 성적도 꼭 파악한다. 그에 따라 진로를 잡는다”고 말했다. 서울대에 진학한 이서준 역시 정 감독의 구분과 배려로 수시전형을 준비했다.

지금 제도로는 엘리트 선수 배출에도, 진학 지도에도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몇해 전 45일까지 허용되던 결석 가능일수가 30일로 바뀌더니 올해에는 20일로 줄어든다. 정 감독은 “학습권 보장 취지인데 이렇게 되면 1년에 한두 대회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말리그가 주요 대회 예선전 성격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기본 취지를 흔든다. 정 감독은 “주말리그 취지는 공감하지만 합리적인 시스템이 돼야 한다. 가령 주말리그는 학습을 위한 순수 경기로 만들어 고3들의 진학 과정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경기 역시 금요일 오후 또는 토요일에 진행해 학습권을 보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승호 선임기자 si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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