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신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법

한겨레 2022. 1. 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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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신냉전 시대에 냉정한 양비론만 필요한 건 아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양비론이 유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쪽 시민들이 '자기' 체제 속에서 인권과 민주, 평등의 이상을 실천하려는 투쟁부터가 절실하다. '우리'가 속한 진영의 문제들을 냉정하게 파악하면서 반대쪽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해 분투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성탄절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시는 본래 따뜻하고 행복해야 한다. 나는 세밑에 지인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낼 때마다 “연말연시를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란다”고 버릇처럼 덧붙이곤 한다. 그러나 이번 같아서는, 나 자신부터 행복보다 불안과 공포를 더 많이 절감한다. 연말연시를 행복하게 보내기에는 오늘날의 세계가 너무나 험악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2020년대 초반에 접어들며 구미권의 패권은 점차 지나간 ‘과거’가 되고 있다. 구매력 기준(PPP·purchasing power parity)으로 본다면 26조달러 규모의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미국(22조달러)을 한참 능가하고, 그 갭은 점차 커지고 있다. 시야를 좀 더 넓혀보면, 청나라가 세계 상품 생산의 중심이었던 1차 아편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인도(약 10조달러)와 러시아(4조달러), 인도네시아(3조달러)와 브라질(3조달러) 등의 국내총생산을 합치면 유럽연합(20조달러)이라는 구미권의 또 하나의 중심과 거의 같은 수준이 된다. 한국(2.5조달러)과 터키(2.7조달러)의 국내총생산을 합치면 일본(5.5조달러)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다. 한마디로, 한때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권을 중심으로 돌아갔던 세계 경제는 이제 구미권·일본과 아시아의 신흥국가들로 ‘양분’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구미권 제국주의 패권의 상대화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다. 반대쪽, 특히 중국과 러시아에도 이미 군수산업과 거대한 군대, 정보기관, 그리고 선전 매체 등을 동원할 수 있는 ‘제국주의’가 성립된 것이다. 구미권 제국주의와 그 반대자 사이의 세계적 대결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신냉전’이라는 말을 쓴다. 1989년에 완결된 본래의 냉전과 달리, 이 신냉전의 승자를 짐작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1985년, 개혁 이전의 소련은 국내총생산이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경제력으로 미국과 무기 경쟁을 벌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필패의 게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생산력은 미국을 이미 압도했고, 현시점에서 남은 과제는 여태까지 구미권·일본의 독무대였던 세계 금융권에 대한 영향력 확대일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그 영향권(벨라루스·카자흐스탄 등) 국가들의 총인구는 구미권·일본 인구의 약 1.5배 이상이다. 그러니 과거의 냉전과 달리 신냉전이 궁극적으로 세계 패권의 다극화, 즉 열강 경쟁의 장기적 제도화로 이어질 가능성 역시 크다. 우리는 앞으로 적어도 수십년 동안 신냉전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신냉전은 과거의 냉전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대립과 대결이다. 핵무기의 시대인 만큼 양쪽은 전면적인 열전을 회피하긴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주변부의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신)냉전이 열전으로 비화된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대략 50만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낳고 총인구의 절반을 피난민으로 만든 시리아 전쟁은 아직도 종식되지 않았다. 만약 러시아 군대가 서방에 대한 ‘협박’의 수준을 넘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면 그 피해 규모 역시 그 정도나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동부 우크라이나는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고, 동남부에는 일가친척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이 전면전의 전장이 되지나 않을지, 평화롭고 아늑해야 할 이 연말연시를 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내는 형편이다.

위험천만한 이 신냉전의 시절을,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나가야 할까? 일단 이 제국주의적 대립에서 양쪽이 내세우는 명분은 현실과 다르다는 점부터 기억해야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0년대, 즉 ‘구’냉전의 최악의 첫 시기를 생각해보자. 46만명의 정치범을 포함해서 약 240만명에 이르는 수용소 죄수들의 노예노동을 마구 사용했던 시절의 소련은 그 이념인 ‘사회주의’의 아름다운 이상과는 실제로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 민중에게 유리한 면이 많았던 사회임에는 틀림없지만 ‘평등’보다 ‘초고속 개발’이 더 중요시된, 마르크스나 레닌의 꿈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었다. 그렇다면 흑인들에게 여전히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인종주의의 총본산인 미국은 과연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국가였을까? ‘제3의 길’을 고민했던 당시 한국 혁신 정당들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인식했듯이, 미·소 양 진영은 결국 불평등과 착취로 점철된 추악한 현실을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라는 미사여구로 호도했을 뿐이다.

오늘날 양쪽의 실정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미국은 ‘서방 진영’의 세계적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목적으로 2021년 12월9~10일 한국도 참가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열었지만, 바로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줄리언 어산지 송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영국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이라크 침공의 내막을 세계시민들에게 공개한 어산지를 ‘간첩법 등 위반 혐의’로 박해·탄압하고 있는 미국형 ‘민주주의’의 질은 과연 얼마나 나은가? 그런가 하면 소수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중국의 국시인 ‘다원일체문화론’과 위구르족에 대한 대량 감금과 감시라는 엄연한 현실 역시 따로 놀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도 중국도 그들이 내세우는 이념들을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실천한 적이 없다는 건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그러나 신냉전 시대에 냉정한 양비론만 필요한 건 아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양비론이 유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쪽 시민들이 ‘자기’ 체제 속에서 인권과 민주, 평등의 이상을 실천하려는 투쟁부터가 절실하다. 과거 냉전의 경험을 다시 돌아보자. 그 시절에 미국을 포함한 서방 진영의 모습을 영원히 바꾼 것은 ‘빨갱이’ 베트남에 대한 침략 전쟁을 반대한 시민들의 목소리였다. 마찬가지로, 서방과의 대립이 거의 새로운 전쟁 직전까지 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러시아 시민들이 아직까지 원칙적으로 출국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출입국 자율화를 위해 투쟁했던 소련 시대 재야인사들의 공로도 있다. 분단과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독재 시절의 한국에서 리영희 선생의 <8억인과의 대화>(1977)나 <분단을 넘어서>(1984) 같은 ‘북방 국가’에 대한 내재적 이해를 위한 선구적 노력들이 결국 냉전 종식 이후의 해빙을 준비했다. 앞으로 신냉전의 이분법적 흑백 사고에 맞서서 우리 시대의 시민들도 이런 노력들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속한 진영의 문제들을 냉정하게 파악하면서 반대쪽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해 분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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