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세상을 유지할 '백신의 학술'을 키워야 한다

2022. 1. 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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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행복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 대표회장/한양대 명예교수

코로나19 백신이 만들어진다면 지구촌의 공공재로 쓰여야 한다는 논의가 무성했지만, 막상 백신이 출현하자 접종은 부유한 국가에게 집중되었다.

인류가 축적해 온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었고, 인류사회가 여전히 약육강식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새삼 일깨웠다. 밑바닥에 온존하고 있던 문제들이 코로나19의 만연으로 인해 백일하에 드러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인데, 한국사회에서도 우려스러운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90년대 말의 외환위기를 겪으며 신자유주의체제가 들어선 이후 한국은 자살률이 매우 높은 나라가 돼 버렸는데, 최근의 한 조사에서는 한국인들의 배금주의적 성향 또한 유달리 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믿을 사람 없고 의지할 사람 없는 각박한 무한경쟁 체제에서 살아오면서, 내 손에 쥐고 있는 돈만이 자존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998년 당시의 외환위기 때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발휘했고 ‘금모으기 운동’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었지만, 한국 사회의 현재적 가치관은 그리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계층격차에 시달리면서 ‘수저론’을 만들어낸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분노를 왜곡된 형태로 해소하려는 경향조차 보이고 있다. 디지털 사용량이 증가하면서 청소년의 자살이 늘었다는 보고도 있었듯이 디지털 환경은 개인들을 비대면 환경 속에 빠뜨리면서 자발적 소외를 유도하고 한국에서도 ‘혼밥’, ‘혼술’이 일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단절’과 ‘격리’를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소통과 공감과 연대의 가치를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가치w관 혼돈 양상이 심해지고 있다.

자신보다 소외되고 약한 대상을 향한 혐오와 증오가 그것인데, 이러한 심리가 정치적 시도와 만나게 되면서 성(gender)과 세대에 따른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공정’ 논의 역시 다르지 않다. ‘공정’과 ‘능력주의’를 엮어 ‘차별’과 ‘불평등’을 능력 차이에 의한 당연한 현상으로 호도하는 주장에 대중이 현혹되고 있고, ‘절차적 공정’에만 매달리는 현상이 조장되고 있다.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단절’과 ‘격리’를 애써 견뎌왔는데, 그 와중에서 정신적 건강은 오히려 나빠지는 역설이 빚어진 것이다.

누구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지 무엇 때문에 자신의 현실이 고통스러운지에 대한 인식이 막연한 가운데, 만만한 누군가에 대한 혐오와 공격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거나 전가하고 싶어하는 경향, 무한경쟁에 내몰리면서 ‘부끄러움’을 상실해버린 풍조를 바꿔야 한다. 한국인들의 높은 문화적 소양이 고도성장의 밑거름이었다는 새뮤얼 헌팅턴의 분석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목전의 즐거움을 잠시 유보하면서 노력하면 보다 나은 미래가 약속된다는 가능성을 젊은이들이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세상을 구현하려면, 인류가 추구해 온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학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보편가치의 추구가 수반되지 않으면 기술발전은 격차와 소외를 심화시킬 것이며, 인류가 존엄성을 유지할 기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일론 머스크가 “미래 사회에서는 인공지능이 상용화돼 인간의 20%만 의미 있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고용없는 성장’으로 인한 청년들의 취업난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발언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인 것 같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발전 속도가 우리가 예측했던 것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듯이, 20%의 사람들만이 직업을 갖게 되는 세상이 정말로 올 수도 있는 것인가? 인간을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 왔으며, 한국에서는 경제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과학기술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사회안전망 수립을 재촉하고 있다.

우리의 방심을 바탕으로 대다수의 존엄한 삶이 위협받을 수 있는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수도 있다면,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는 가치와 이념을 수립하고 그것을 시민사회와 공유하며 제도적으로 관철시킬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격차와 차별이 심화되고 약자에게 더욱 큰 고통이 전가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장치를 만들고,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진 세상에서 배려하고 격려하고 화합하면서, 아무도 자살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으면서 삶을 영위해가는 세상을 꿈꾸려면, 그런 세상에 필요한 가치를 만들고 제도를 창출하는 공부를 미리미리 발전시키면서 미래를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 대한 과학기술의 긍정적 기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도, 기술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결합된 우수한 성과물로써 산업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인문사회 분야의 공부를 강화해야 한다.

지식산업의 역할과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고, 기술발전이 초래한 생활상의 변화로 인해 문화산업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대외의존도가 유달리 높은 나라로서 국가이미지 개선과 소프트파워 제고에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서도, 한국은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이번의 코로나 사태를 ‘백신의 학술’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십여 년 전 한국에서는 ‘치유의 인문학’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를 맞아서는 ‘위로의 인문학’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목전의 고통을 견디면서 희망을 품고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공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삶이 질곡에 빠지기 전에 문제의 발생을 미리 차단하는 일이다. 병을 앓는 고통이나 후유증이 남을 우려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인간의 무분별하고 부도덕한 욕망의 추구가 초래한 코로나 사태는 건전한 가치가 관철되는 공동체가 구현될 때 개개인의 존엄과 생명이 보장된다는 점을 알려 줬고,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와 제도적 실천을 더욱 발전시켜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가뜩이나 심각한 소외에 시달려 온 인문사회 분야를 위축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최근 5년 동안 국가R&D 예산이 8.9% 급증했지만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연구 예산은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연평균 1.3% 증가에 그쳤고, 대학들은 문과 분야의 학과를 없애거나 교수충원을 기피하고 있어서, 미래사회를 대비할 연구와 교육 역량이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

교육부의 발표에 의하면 2020년의 청년 취업률은 65.1%로서 2011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가뜩이나 취업난에 시달려 온 청년층의 고통을 코로나19가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학부취업률은 떨어졌지만 대학원 취업률은 높아졌다. 대학이 지식산업 시대를 선도하는 연구기관이어야 한다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

대학의 유연한 운영을 도모하더라도, 각 학문 분야의 연구자 규모와 연구 역량은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군대를 해산해버리는 국가운영과 당장의 수요가 크지 않다고 해서 학문 영역의 절반을 붕궤시켜버리는 학술정책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연구와 교육에 공공투자가 가해지면 나중에 엄청난 사회적 효용과 부가가치의 창출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혜안을 가진 지도자와 정책담당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미래를 준비하는 포부가 담겨진 <제2차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 기본계획>이 반갑고 고맙다. 교육부는 ‘학술전담기구 설립’을, 문체부는 ‘인문문화진흥원 설립’을 기획했는데, 다른 사업들의 지속적인 발전과 더불어, 이 계획들이 반드시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더는 시장의 선택이나 소외 속에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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