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홍상수 영화에서 발견한 낯선 희망

2022. 1. 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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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희망 담론 넘쳐나지만
과거 메시지 복제 수준 그쳐
희망은 뻔하지 않고 낯선 것
문제 해결 위해 새로움 절실

지금 나는 희망을 발명하려 한다. 과거의 희망을 복사한 것은 희망일 리 없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이 여러 번 증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또 가져다가 2022년 희망이라고 불러세운다면 결국 곡학이나 혹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에서 희망의 원형을 보았다. 홍 감독의 변화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감사하게도 성숙하고 있다. 그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시대인으로서 희망에 대한 전언을 우리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당신 얼굴 앞에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희망을 발명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귀은 국립경상대 교수·작가
주연은 ‘이혜영’이다. 이혜영이 주연이니 그 ‘얼굴’만으로도 낯선 희망이 시작될 이유가 생긴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옥’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니 치료가 무의미하다. 그녀는 생존에 매달리지 않고 삶을 지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앞’을 응시한다. 자신의 얼굴이 아닌, 그 앞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 앞에는 자기만큼 취약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그 취약한 사람에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문제는, 말걸기에 계속 실패한다는 데 있다. 상옥은 자기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도, 상대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말걸기의 실패가 끊임없는 말걸기의 이유가 된다. 영화는 이 말걸기가 희망이고, 팬데믹의 고통을 건너갈 수 있는 대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스크린데일리(Screendaily), 더 플레이리스트(The Playlist), 슬랜트(Slant), 할리우드 리포터, 아시안무비플러스(AMP) 등에서 <당신 얼굴 앞에서>가 홍상수 최고의 영화이며,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또 위로하는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상옥이 어린아이를 안고 “지은이 이쁘다”라고 말할 때, 바로 그곳에 삶과 희망이 있음을 발견한다. 시한부 여인이 연약한 어린아이를 안고 따뜻함을 느낀다. 그녀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따스함이다. 여기에 감상 따위를 섞을 수는 없다. 이 장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감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녀가 아이를 안고 느꼈을 고통이 감지된다. 마치 자상을 입듯,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장면은 고통이 없고서는 희망도, 삶도, 기쁨도 없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준다.

상옥이 자고 있는 여동생 정옥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손을 동생 손 위에 올린다. 그 손이 닿기까지 얼마나 힘겨웠을까도 가늠된다. 그러나 그 고통이 없다면 삶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고통 없는 생존보다 고통어린 기쁨의 삶이 더 살만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팬데믹뿐이겠는가. 그러니까 고통은 삶의 기본값이고, 우리는 고통과 편안 중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태도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없애준다는, 고통 없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약속은 희망이 아니라 권력자의 정치적 수사이거나 거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2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희망이 담론이 여기저기서 메아리처럼 울린다. 메아리가 그렇듯, 이 희망의 메시지도 어디든 똑같다. 내용은 공허하고 동어반복의 연속이다. 희망은 빤하지 않고 낯설 수밖에 없다.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까지 없던 것을 이루려는 것이 희망이라면, 과거의 메시지를 복제한 것이 어떻게 희망이 되겠는가.

희망은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코로나가 종식되고 팬데믹의 위험 없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해질 거라는 기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대는 맹목적이고 금방 무너질 수도 있는 허술한 것이다. 희망은 맹목적이지도, 부실하지도 않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취약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강한 필연성 위에서 싹트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얼굴 앞’이 아니라 ‘나의 얼굴’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얼굴에 도취하고, 내 피로에 연민하고, 내게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늘 방어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타인이 내 삶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던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각보다 쉬웠던 것, 오히려 그것이 내 삶을 보호한다고 합리화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얼굴’만 바라보는 관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 얼굴 앞’을 보니 그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알겠다. 나의 얼굴 앞에도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취약한 누군가가 있다.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이 내 말을 가로막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에게 말걸기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실패할 것이고, 그래서 오히려 나는 그에게 말걸기를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 얼굴 앞에서>가 가르쳐준 희망이며, 나는 이 희망 때문에 이제 단지 그의 딸로서가 아니라 그 관계를 넘어서 삶의 이야기를 그와 함께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말대로, 사랑은 다리를 절며 함께 걷는 것이다. 서로 다른 길이의 다리로 힘겹게 걷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발명해야 할 희망의 전제일 것이다. 희망의 전신은 고통이며, 그것을 긍정해야 ‘생존’이 아닌 ‘삶’이 있을 것이다. 낯선 희망을 발명한 자들과 연대하고 싶다. 그들은 고통을 아는 자들일 것이다.

한귀은 국립경상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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