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아동센터의 래디컬 헬퍼들

한겨레 2022. 1. 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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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이후 많은 돌봄서비스가 중단되며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각 지역아동센터로 몰리고 있다. 박승화 기자

[왜냐면] 김용희 | 하늘샘 지역아동센터장

엘라의 아들은 위협적인 폭력과 자해로 통제 불능인데다 막내딸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열여섯살 둘째는 임신 중이다. 이런 엘라를 돕기 위해 20개 기관 73명의 전문가가 그녀의 삶에 관여하고 있지만, 막상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따른 피로감으로 엘라는 휴대전화 두대를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그렇다고 엘라가 피하고 싶어 하는 복지 담당자들의 삶이 나은 것도 없다. 엘라를 도와주려는 사회복지사들은 감당하기 힘든 사례들과 시간에 쫓겨가며 자주 멈추는 컴퓨터에 기록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것은 힐러리 코텀의 저서 <래디컬 헬프>에 나오는, 영국 런던 중심지에 살고 있는 엘라를 둘러싸고 있는 복지체계의 현실이다.

민호(가명)는 지역아동센터에서 학습에서부터 예체능에 이르는 10여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받고 관련 기관 4곳에서 센터나 학교에서 주지 못하는 지원을 받았지만, 코로나가 닥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민호에게 제공되던 목욕과 태권도 학원 등 다른 모든 서비스는 중단되었고, 남은 유일한 기관이 지역아동센터였다. 공공기관과 복지관, 상담기관, 심지어 학교조차 문을 닫았다. 지역아동센터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았다. 꼭 필요한 경우 긴급돌봄을 실시하되 외부 강사는 오면 안 된다는 지침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정지되었고 외딴섬처럼 고립된 지역아동센터 안에서 오로지 센터 교사들로만 그 긴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긴급돌봄이라고 하지만 부모들은 여전히 일을 나가야 했고, 갈 데가 없어진 아이들은 센터로 나왔다. 스도쿠 게임을 하고 동네 은행나무 산책, 글쓰기, 요리, 전래놀이 시간 등. 보통의 경우라면 30분 안에 끝났을 그 시간들은 배로 늘어났다. 다행히도 민호와 아이들은 사회복지사들의 걱정만큼 위축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정지된 곳에 있으면서도 바람개비처럼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교사들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하는 사회복지사들이었다. 오지 못하는 강사 역할까지 떠안는 바람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미등원 아이들에게 전달해야 할 식품 꾸러미를 만들어 갖다주고 나면 밖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기록과의 전쟁. 바로 처리해야 하는 행정업무는 기본이고, 아이들 관찰과 수시로 이뤄지는 전화 상담 일지 작성, 코로나 일일보고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코로나의 시간처럼, 늦은 저녁까지 센터의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사회적 돌봄노동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복지사들에게 번아웃(소진)이 진작에 찾아왔지만 대체할 인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소진을 보상할 체계조차 허술했다. 런던 중심지에서 일어나는 밑바닥 복지 현실과 대한민국의 지역아동센터 현장이 마치 평행이론처럼 닮았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돌봄을 받는 대상자는 안전하고 건강할까. 건강한 노동이 건강한 돌봄을 만들어낸다. 지금까지의 방식은 한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데 들어갈 노동의 총량을 먼저 계산하는 대신 사회복지사 한명을 세워둔 채 국가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떠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책임도 당연히 그 아이를 맡고 있는 사회복지사의 몫이었다. 복지 현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전문가로서 성장할 교육의 기회도 시간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안전하고 건강한 돌봄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위한 시스템의 마련이 절실한 이유다.

“우리의 복지제도는 우리가 쓰러질 때 우리를 일으켜 줄지는 모르지만 다시 날아오르도록 도와주지는 못한다.”(<래디컬 헬프>) 그럼에도 코로나의 어두운 터널에 갇혀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건, 깊은 어둠을 밀어내며 떠오르는 매일의 해처럼 터널 밖 환한 세상으로 아이들을 훨훨 날아오르게 하겠다는 래디컬 헬퍼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새로운 해에 새로운 꿈을 꾸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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