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의 아이러니]책갈피에서 떨어진 메모
[경향신문]
신간도 아니고 소장할 책도 아니라면 올해로 개관 100주년이 되는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빌린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 책갈피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북마크를 발견할 때도 있고, 메모지를 발견할 때도 있다. 심지어 명함을 발견한 적도 있다. 그럴 때면 누군지 모를 사람과 아슬아슬한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낭만적인 느낌이 든다.
칼럼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22년 1월1일이다. SF 영화의 도입부 같은 날짜다. 새해를 맞이하여 서가를 정리하는데, 30여년 전에 친구가 준 낡은 책이 눈에 띈다. 알베르 카뮈의 저작에서 글귀들을 발췌한 잠언록이다. 몇 구절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시시포스 신화’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사람들이 영광이라 부르는 것을 이해한다. 그것은 절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권리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의 조합이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이다.
상념에 사로잡혀 책장을 넘겨보는데, 얇은 메모지 두 장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렇다. 이 책의 책갈피에는 메모지가 있다. 나는 책에 끼워진 채 전달된 메모지를 10여년 만에 다시 살펴본다. 친구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모양이다. 메모지에는 카페 주인이 친구에게 남긴 이런저런 지시가 적혀 있다. ‘저녁에 불단속 잘 하고 가요.’ 주인이 먼저 퇴근한 날이었나 보다. ‘김○모 씨가 멘델스죤 판을 가져오면 받아 두어요.’ 어떤 이가 LP판을 가져오기로 했나 보다.
메모지에 얽힌 시간서 지금까지
명멸한 시간들을 돌이켜보고
남겨진 시간들을 생각해본다
이를 데 없이 풍요로운 세상
얼마나 많은 이가 누리는지 궁금
그 카페에는 나도 이따금 갔었다. 그 친구와 맥주를 마시다가 열린 창문 너머 밤하늘로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은 순간은 마치 흑백사진처럼 내 마음에 인화되어 있다. 친구를 검색해 본다. 긴 유학을 마치고 철학자가 된 친구가 어느 영화감독과 대담하는 영상을 발견한다. 예전보다 쾌활하고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카페 구석에서 숨죽이며 LP판을 듣던 시간들, 무거운 시대에 짓눌린 날들, 그러면서도 청춘의 환희와 희망에 들떴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저 메모지가 책에 매장된 시간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긴 세월 동안 명멸한 사건들을 돌이켜본다. 이룬 꿈도 있고, 슬며시 버린 꿈도 있다. 지켜준 이도 있고, 끝내 못 지켜준 이도 있다.
연락이 끊긴 친구의 근황을 바로 찾을 수 있는 세상, 물건을 주문하면 다음날 현관 앞에 놓이는 세상이 되었다. 무한한 영상과 이야기와 지식이 손끝에 있는 세상, 암이 더 이상 사망선고가 아닌 세상이다. 그런가 하면 기후위기가 점점 현실화되고, 마스크 없이는 외출할 수 없는 시절이다. 행복의 가능성은 명백히 증가했지만, 정말로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이를 데 없이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그 혜택을 얼마나 많은 이가 누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제는 절친한 고교 동창과 통화했다. 평생을 몸담아온 회사의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한다. 중견기업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마침내 회장이 되었던 친구다. 나는 입지전적인 성취를 이룬 후 인생 제2막을 구상하는 그의 은퇴를 축하하며, ‘앞으로 더 즐겁게 살자’며 전화를 끊었다. 나 또한 생업인 변호사 일과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일의 비중을 차근차근 조정할 생각이다. 불의의 사건이 없고 건강을 유지한 사람에게 두 번째 인생을 허락하는 시대가 된 것은 어쨌든 근사한 일이다.
다시 메모를 살펴본다. ‘아무나 음악실에 들여보내지 말고 음악은 알아서 하기 바랍니다.’ 맞다. 그 카페에는 음반을 비치하고 틀어주던 작은 공간이 있었다. 메모지 아래쪽에는 ‘Lethe’라는 카페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손님이 음악을 신청할 때 사용하는 메모지다. ‘레테’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망각의 여신인데, 저승에는 그의 이름을 딴 강이 흐른다고 한다. 이 강물을 마시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되는데, 저승에 가는 사람은 이 강물을 마셔야 한다. 나는 문득 40대의 주인이 언젠가 내게 ‘남편은 예전에 하늘나라로 떠났어요’라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카페 이름이 그 사연과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해 본다.
메모지가 내게 넘어온 날로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만큼의 시간이 내게 또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짧으면 십 년, 길면 삼십 년의 시간이 내게 주어질 것이다. 카뮈의 책을 준 친구는 자신의 철학과 삶을 잘 일치시키며 살아온 것 같다. 감사할 따름이다. 너무 빨리 레테의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카페 레테의 주인은 어딘가에서 노년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새해를 맞이한 그의 평화와 강녕을 빈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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