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세계유산 추진 사도 광산, 조선인 노역은 ‘동원 시작’ ‘귀국’ 두줄 뿐

사도(니가타현)/최은경 특파원 2022. 1. 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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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세계문화유산 추진 사도광산 현장 가보니

‘니가타에 어서 오세요! 사도(佐渡)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지난해 12월 30일 귀성객으로 북적이는 니가타역 신칸센 승하차장.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자는 대형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일본 문화청 산하 문화심의회가 이틀 전 사도광산 유적을 일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정식 결정한 후, 지자체부터 적극 홍보에 나선 모양새였다.

지난달 30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갱도에 있는 전시장 모습. 광부들이 기술자로 대접받고, 4시간 교대 근무를 하며 휴게소에서 쉬었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조선인 강제 동원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도(니가타현)=최은경 특파원

니가타시 페리 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70여 분을 가자 사도섬 료쓰항이 나타났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섬을 가로지르고, 산길을 올라 사도광산에 도착했다. 사도광산은 당초 사도섬 내의 모든 광산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현재 추천 후보로 거론되는 곳은 서북부에 있는 아이카와·쓰루코 광산을 뜻한다. 1603년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 아래 본격 개발돼 에도시대 일본 최대 금·은 생산지로 이름을 알린 곳으로, 우리에겐 조선인 강제 노역의 현장이기도 하다.

사도광산 갱도는 섬 동서 3000m·남북 600m 지역에 걸쳐 지하 800m 아래까지 400㎞가량 구불구불 펼쳐져 있다. 이 중 일부를 박물관과 같은 전시장으로 관광객에게도 공개한다. 이날 둘러본 갱도 코스는 ‘에도시대’와 ‘메이지 이후’ 두 곳으로 분류돼 있었다. 에도시대 코스(약 500m)보다, 메이지 이후 코스(약 1.5㎞) 규모가 더 컸다. 니가타현과 사도시 주장처럼 사도광산이 에도시대에 한정된 유적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갱도 천장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각각 30~40분가량 걸리는 두 코스를 걸을수록 지하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조명이 약한 곳은 어두컴컴해 전시물의 글자를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그곳에 쪼그려 앉아 작업하는 에도시대 사람을 재현한 인형이 작업의 험난함을 짐작하게 했다.

메이지 이후 견학 코스에서 험난했던 갱도 작업의 기록은 지워졌다. 조선인 강제 노역 사실도 마찬가지다. 별도 전시물이나 안내문은 아예 없었고, 일본의 화려한 근대 산업화 실적을 강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도광산은

그럼에도 ‘조선인’ 기록을 당시 광물 운반용 전차 보수 등에 활용하던 기계 공장의 벽 한쪽에 붙은 연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메이지 시대부터 1989년 폐광까지 사도광산 근대사를 빼곡히 기록한 연표 100여 줄 가운데 ‘조선인’이 두 차례 분명히 언급돼 있었다. ‘1939년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동원이 시작’ ‘1945년 9월 조선인 노동자 귀조(歸朝)’. 일본이 사도광산과 한국의 관련 부분을 숨기려 했지만, 1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이곳에 동원돼 강제 노역한 사실은 없애지 못했다.

인구 5만명의 사도시 주민들 사이에서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후반. 문화심의회에 정식 신청서를 낸 것만 6번이다. 지난해 신청서를 보면 사도광산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에도시대(1603~1868년)’에 한정했다. 2007년 세계유산 잠정 후보 신청서를 처음 낼 때만 해도 ‘사도광산의 빠른 광업 근대화가 일본 다른 지역과 동아시아 광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강조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곳이 태평양전쟁 당시 구리 등 전쟁 물자를 생산해 조달하는 지역이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실태 보고서(2019년)에 따르면, 조선인 최소 1140명이 사도광산에 동원돼 강제 노역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니가타 노동 당국이 1949년 발표한 귀국 조선인 미지급 임금 관련 조사 기록에는 이들이 임금 23만1059엔59전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0년대 한일 협정 과정에서 확인된 사도광산 강제 동원 피해자만 148명이다. 9명이 현지에서 사망했고, 73명이 후유증을 신고했는데 이 중 30명이 진폐증, 15명이 폐 질환을 호소했다.

사도시 주민들은 “이번에는 꼭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것”이라고 했다. 인구와 관광객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사실상 소멸 위기에 놓인 사도를 살릴 거의 마지막 수단이라는 얘기다. “한국에서 과거 징용공 문제로 반대한다고 하고 나서 머리가 아프다”는 주민도 있었다.

국내에선 사도광산이 ‘제2의 군함도 사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2015년 일본 정부는 나가사키 군함도(하시마) 등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강제 노역 사실 기술과 추모를 위한 후속 조치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도쿄에 개설한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오히려 강제 동원과 노역을 은폐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번에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간을 에도시대로 한정하고, 전시장에서 조선인 기록을 사실상 은폐해 강제 노역 역사를 지우려 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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