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병원장 출신 60대 '명의'.. 시골 보건소장 자원해 코로나 최전방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강타한 지 2년이 지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60만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5000명을 돌파한 지 오래다. 정부의 방역대책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바이러스 확산을 이 정도에서 막을 수 있었던 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맡은 일을 해내고, 희생을 감수하면서 방역조치를 따른 국민들의 노력 덕분이다. 조선비즈는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노력한 이들을 인터뷰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인 이들이야 말로 코로나 시대의 숨은 영웅이다. [편집자주]
권성준(67) 양양군보건소장은 지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 한양대병원장을 지낸 자타공인 ‘명의’다. 대한위암학회장도 역임했다. 이런 경력의 명의가 지방 보건소장을 자원해 지난해 1월부터 양양군보건소를 이끌고 있다. 그가 부임하기 전 강원도 내 시·군 보건소장 중 의사 출신은 전무했다.
양양은 동해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서핑지로 유명하지만 인구가 2만8000명에 불과하다. 종합병원은 없고, 의원급 병원을 다 모아도 5곳 정도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19 의심 환자의 진단부터 확진 안내까지 모든 업무를 보건소가 도맡고 있다. 확진자가 생기면 보건소 직원이 모두 달라붙어 진단과 소독, 역학조사를 해야 한다.
확진자가 발생하면 하루에 1130명을 검사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바쁜 곳이지만, 지난달 9일 강원도 양양군보건소에서 만난 권 소장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환자들에게 다가가는 의사가 되고 싶다”며 “코로나로 보건소 직원들 모두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2022년에도 지역 주민들을 위해 더 바쁘게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양양에서 어릴 때 꿈꿨던 소망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영화 속 왕진 의사들처럼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환자를 돌보는 것이다. 권 소장은 일주일에 두번씩 보건지소를 찾아다니며 환자를 만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대한위암학회장에 한양대병원장까지 역임했다. 인생 2막의 무대로 양양군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
“정년 퇴임을 5~6년 남겨뒀을 때부터 정년 이후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32년 동안 외과 교수로 일했다.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상을 살았다. 인생 2막이라고 할 수 있는 정년 퇴임 후에는 좀 빛깔이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의료 낙후 지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 지인이 양양군이 고향이었는데, 의료 상황을 말해줬다. 내가 양양군에 간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양은 강원도 내에서도 인구가 적은 지역 중 하나다.
“양양군은 인구가 2만8000명이다. 종합병원은 물론이고, 의원도 부족하다. 현재 의원은 5곳이다. 입원실이 없어 중증환자가 생기면 강릉이나 속초로 가야 한다. 의료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양양군은 고령층이 많다. 인구 구조를 파악해보니 고령 인구가 30%를 넘었다. 고령층이 많을수록 코로나에 취약하다.”
-양양군의 코로나 확진자 현황은 어떤가.
“2020년부터 코로나에 확진된 군민은 총 218명이다. 1년에 100명 정도의 확진자가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이 지역은 외부인들이 관광 목적으로 많이 방문한다. 확진자들의 역학 구조를 살펴보면 외부인에 의해 감염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2020년 12월 초 선별진료소가 보건소 앞에 별도로 생겼다. 덕분에 집단감염에 좀 더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 학교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는데,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하루에 1130명을 검사하느라고 직원 모두 밤을 샜다.”
-1년에 확진자가 100명이면 관리가 잘 된건가.
“청년 인구가 적어서 그 정도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는 유동인구와 확진자 수가 비례한다. 아무래도 나이 드신 분이 많다 보니 전파 속도가 대도시에 비해 느리다.”
-진단부터 후송, 안내까지 모두 보건소 직원들이 도맡고 있다.
“보건소장으로 와서 공무원을 처음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국민들의 공무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는 않은 거 같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보건소 직원들이 너무 헌신적이다. 역학조사 과정이라는 게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 게 아니다. 밤 10시에도 퇴근 못하는 직원이 많다. 추가 수당이 나오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 적다. 그런데도 직원 중 불평하는 사람이 하나 없다. 내가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더니 ‘공무원은 원래 그런겁니다’라고 하더라. 굉장히 감동했었다. 그래서 나도 많이 반성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위암 권위자’다. 제안도 많이 들어왔을 거 같다.
“수술을 더 해달라는 지방 대형병원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원래 생각하고 있던 봉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형병원들을 거치고 좀 더 늦은 나이에 보건소장 같은 기회가 생길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한 봉사는 건강이 허락될 때 하는 것이다. 누릴 거 다 누리고 백발에 허리 구부러지고 하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한 번도 안 살아봤을텐데.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좀 힘들었다. 서울하고 너무 달랐다. 대형마트나 백화점은 없다. 길거리에 다이소 하나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요즘은 오후 5시 30분 정도면 해가 져버리는데, 코로나라서 손님도 없으니까 가게들이 모두 일찍 문을 닫아 거리가 깜깜하다. 그래도 내가 적응력이 굉장히 강해서 어디다 갖다 놔도 알아서 살아남는다. 산에 다니는 친구도 생기고, 술 마시는 친구도 생겼다.”
-보건소장으로 온 뒤 일반 진료도 많이 늘린 것으로 알고 있다. 진료는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
“처음 왔을 땐 결재 서류가 많아 진료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행정적인 것은 중요 사항만 확인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번이던 진료를 네번으로 늘렸다. 특히 보건지소를 찾아가는 순회진료를 늘렸다. 옛날 영화를 보면 자전거 타고 가방 하나 들고 다니는 의사가 등장하지 않나. 꼬마 때 왕진 의사들이 천사처럼 보여 의사를 꿈꾸게 됐다. 자전거 대신 아반떼 타고 환자를 찾아가는 게 바뀌긴 했다.”
-대학병원에서 환자를 볼 때와 보건소장으로 환자를 보는 건 다른 느낌일 것 같다.
“대학병원에선 환자 1명과 2~3분 이상 말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이곳에 와서 환자 1명당 10분 이상은 무조건 설명해주고 있다. 내가 먼저 증상도 물어보고 설명도 충분하게 해준다. 어떤 할머니는 80세 인생에 가운 입은 의사 앞에서 이렇게 오래 앉아있어 본 적은 처음이라는 말도 하더라.”
-코로나 시대가 쉽게 끝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힘든 점이 있나.
“보건소와 같은 공공 의료 시스템의 역할은 ‘예방’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의 환자가 늘어나고 악화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 보건소의 주목적이다. 하지만 이 역할이 코로나 때문에 모두 중단됐다. 대표적으로 노인들의 인지장애가 치매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뇌 운동을 해주는 집단 교육 시스템이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할 수 없게 됐다. 보건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데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니 마음이 아프다.”
-보건소장이 된 지 1년이 다 돼 간다.
“군에서 감사하게도 행정적으로 부담을 많이 덜어줘 더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의사가 될 수 있었다. 보건소장의 임기는 최장 5년이다. 2년을 하고 1년씩 연장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선 5년 다 채우고 싶다. 가끔 서울에 한 달에 2번 정도 가는데, 이제는 양양이 더 좋다. 힘이 닿는 데까지 양양에서 ‘인생 2막’을 즐기면서 봉사하고 싶다.”
-코로나가 터지고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시간이었는지 궁금하다. 어떤 부분이 가장 달라졌나.
“우연히 감염병이 창궐한 시절에 보건소장으로 오게 됐다. 큰 소득이 있다면 보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환자를 대하고 일하는지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이걸 국민들에게 많이 알리고 싶다. 외과의사가 병원에서 중심 축으로 제일 힘들게 일하는 것과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직원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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