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조선인이 싫었던 한 젊은이의 우토로 방화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2022. 1.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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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 범죄'에 '기억과 추억'의 상실 위협받는 재일 조선인의 삶

[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8월30일 우토로 화재 현장.('우토로 지킴이' 김수환 제공)© 뉴스1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2021년 8월 30일. 필자의 페이스북에 우토로에 화재가 났다는 뉴스가 들렸다.

7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살던 주민이 공영주택으로 이주해 빈집이었던 3채, 창고 2채가 홀랑 타버렸고, 아직 주민이 거주하는 2채에서는 다행히 인명 손실이 없었다고 한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불행히도 2022년 4월 완공 예정인 '우토로 평화기념관'에 전시될 각종 입간판 36점이 이번 화재로 소실되었다. 2000년 초중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던 우토로 주민들과 지지 방문자들이 만든 입간판들이다. 우토로를 방문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 등의 구호가 적힌 것들이다.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일본 정부는 전국 5곳에 군사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한다. 이 중 하나로 선택한 곳이 현 교토부 우지시 일대였다. 비행장 공사에 동원된 인원은 2000여 명, 그 중 1300명이 조선사람이었다. 변변한 숙박시설도 없던 노무자들은 공사장 주위에 오손도손 모여 살았다. 핍박 받던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수도가 없어 비가 오면 똥물이 차 올랐던 '우토로' 마을이었지만 거기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고 해방이 되자 '조선학교'도 만들었다.

그렇게 50년이 넘게 살았건만 어느날, 그 땅의 법적 소유자였던 부동산 회사가 '퇴거'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1989년의 일이었다. 10년을 넘게 끈 재판에서 일본 최고 재판소(대법원)은 원고 측 주장을 인정해 주민들에게 퇴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200명이 넘는 주민들을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 쫓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주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했다. 한국 시민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 활동가들이 2005년부터 조사활동을 시작해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일본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땅을 매입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 시절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우토로를 직접 보기 위해 방문했다. 일제 강점기 군사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시절 그 모습대로 보존된 함바와 양철지붕으로 얼기설기 지은 목조 집들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현장'이었고 '역사' 그 자체였다. 우토로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담아 주민들과 함께 입간판에 글과 그림을 남겼고 마을 곳곳에 장식했다. 그 근처를 가면 누구나 쉽게 우토로 마을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2022년 4월에 완공된 '우토로 평화 기념관'에 이 흔적들이 그대로 전시될 예정이었다. 철거된 함바집의 부속물이나 그 옛날의 흔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전시물들이 화재로 인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불이 기억을 집어 삼켰다.

우토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의 모습이 보인다. 이 간판들이 이번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몽당연필 제공) © 뉴스1
우토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의 모습이 보인다. 이 간판들이 이번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몽당연필 제공) © 뉴스1

애초에 주민들은 이 화재를 '자연 발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워낙 낡고 오래된 건물이었으니 작은 담배 꽁초 불씨에도 잘 타오를만 했다. 그러나 12월 어느날, 방화범이 잡혔다는 경찰의 발표가 있었다. 충격이었다. 이제는 방화까지 하는구나.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범인은 나라현 사쿠라이시에 거주하는 아리모토 쇼고라는 22세 청년이었다. 조사를 받으며 그가 한 말이 어이를 상실하게 했다. '눈에 띄고 싶었다', '조선인이 싫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어떻게 볼까? 단순 방화? 아니면 '헤이트 범죄'? 범인이 검거된 시점에서 인명에 의해 저질러진 화재임에 분노한 시민들이 긴급 집회를 열었다. 경찰과 검찰에게 철저한 조사를 통해 그가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경위를 밝히고 그 과정에서 '헤이트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면 단호하게 벌하라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미 이 사건을 '헤이트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의 악몽을 떠올릴 것까지도 없다. 민간인과 군경에 의한 조선인 6000여명 학살. 사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2000년대, 특히 우토로에 가해진 폭력만 점검해 보자. 이번 사건이 결코 단일 사건이 아니라 어떤 흐름의 연장선에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시작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악명 높은 '재특회(재일조선인의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모임)'의 대표 사쿠라이 마코토로부터 시작한다. 2006년 결성된 이 모임은 잠시 인터넷 상에서 활동하다가 드디어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다. 그는 일군의 추종자를 이끌고 각종 혐오 시위를 벌이고 이를 촬영해 '니코니코 동영상'과 유튜브에 자랑하듯 올리는 행위를 일삼았다. 그중에 하나가 우토로였다.

재특회를 비롯한 일본 극우 시민들의 거리 시위(트위터 갈무리) © 뉴스1

2008년 12월 어느날 사쿠라이는 추종자들과 함께 우토로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큰소리로 '조선 놈들 나와라', '조선인들이 이 곳을 불법점거하고 있다', '최고재판소의 명령을 지켜라', '일본 국민으로서 용서하지 않겠다' 등을 외치며 동네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이후 2015년까지 총 13차례의 각종 집회, 가두선전, 시청 항의방문, 우토로 주변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가 올린 동영상에서 사쿠라이 마코토는 우토로 마을 주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의 존재 자체가 범죄행위야!"

교토조선제1초급학교를 재특회의 불한당들이 습격한 '교토 조선학교 습격사건'이 일어난 것이 2009년 12월 4일이었다. 이들은 그 일주일 뒤인 12월 20일에도 대규모 거리시위를 우토로에서 열었다. '교토 조선학교 습격사건'은 이후 조선학교 측의 소송으로 형사, 민사 상의 책임을 묻게 되었고 2014년에 원고 승소로 최종 결론이 났다. 이 때문이었을까? 2014년 이후 이들의 교토에서의 시위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저 수많은 군중들이 어쩌면 우리 마을을 쳐 들어와 집을 부수고 욕을 하며 사람을 때릴 수도 있겠구나. 우토로 마을 주민들에게 이 시간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이번 방화 사건은 그 공포를 고스란히 되살렸다.

일본 시민단체 및 우토로 주민들이 8월의 우토로 방화 사건을 '헤이트 범죄'로 보는 이유는 명백하다. 범인이 이미 7월에 나고야 민단 건물 옆에 위치한 한국학교에 방화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거주하는 나라현에서 거리가 있는 교토까지 굳이 찾아와 우토로에 방화를 저지른 것도 이유 중에 하나다. 한때 그들 혐오주의자들에게는 화재가 되었던 곳이니까.

며칠 전 열린 일본 시민단체와 재일동포들의 온라인 집회에서 우토로에서 태어나 자란 변호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 마을에서 보낸 나의 추억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은 기억을 통해 자신을 증명합니다. 나를 증명할 것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발언자들은 '헤이트 범죄'를 이렇게 정의했다.

"헤이트 범죄란 피부색, 언어, 종교, 신조, 국적, 민족이나 종족 출신, 연령, 장애, 젠더, 성적지향을 이유로 그 집단 또는 그 구성원에게 행하는 범죄이다."

"헤이트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우발적인 범죄에 그치지 않는다. (중략) 헤이트 범죄는 특정인을 집단적으로 배제하는 행위에서 출발해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위험한 범죄인 것이다." (교토부, 교토시에 유효한 헤이트스피치 대책 추진을 요구하는 모임 성명문에서 발췌)

2016년부터 일본에는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이라는 것이 생겼다. 처벌 조항이 없는 한계가 있으나 지자체의 각종 조례를 이끌어내기도 했고 경찰도 협조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지난 5년간 단 한번에 유사한 범죄로 기소된 사건 중에 '헤이트 범죄'로 규정해 판결이 난 경우는 단 한건도 없었다고 한다. 유사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며 이의 근절을 위해 싸우는 시민들의 요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재특회 대표였던 사쿠라이 마코토는 2016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고 11만표로 낙선했으나 '일본제1당'이라는 당을 만들어 당수로 살고 있다. 그는 이제 공식 선거전에서 공공연히 재일조선인 혐오를 유포하고 있다.

2017년 한국과 재일동포 청년들이 우토로에서 만났다. 우토로 주민들과 불고기 모임을 하던 '에루화' 앞 마당.(몽당연필 제공) © 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sseo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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