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더 두려운 일

한겨레 2021. 12. 3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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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악당 두목이 붙잡은 적이나 양민에게 선심을 쓴다.

악당 두목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충고하는 선량한 부하라는 것은, 목숨이 열개 있어도 위태로워 보이니 말이다.

아마 한 조직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목보다 착한 부하가 생존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것보다, 악당이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하는 것, 그게 훨씬 두려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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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을 받고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1961). 위키미디어

김영준 | 열린책들 편집이사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악당 두목이 붙잡은 적이나 양민에게 선심을 쓴다. “좋아, 너희까지는 살려주지.” 영화에서는 그때 그러지 말라고 조언하는 음침한 얼굴의 부하가 옆에 한명쯤 있기 마련이다. 두목보다도 잔인하고, 의심 많고, 집요하게 사악한 이런 유형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들이 온건한 성품의 부하보다는 그럴듯하다고 느낀다. 악당 두목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충고하는 선량한 부하라는 것은, 목숨이 열개 있어도 위태로워 보이니 말이다. 아마 한 조직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목보다 착한 부하가 생존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것일지 모른다.

2차 대전 말 독일의 패배가 명백해 보일 무렵, 지금까지 협조적이던 헝가리 정부가 부탁을 하나 해온다. 수천명의 자국 유대인들을 중립국으로 풀어주려고 하는데 눈감아달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히틀러는 동의한다. 아마 총통은 이 판국에 골치 아픈 실랑이를 해봐야 이득이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유대인 말살 실무의 총책임자인 아이히만이 제동을 건다. 총통의 지시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히만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밖에 없으며, 이런 예로 아이히만이 히틀러보다 한술 더 뜨는 악당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잠자코 있으면 살릴 사람들을 굳이 죽이기 위해 그가 의식적인 선택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선택을 ‘평범함’이나 ‘복종’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는 어렵다(분명히 그는 복종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20년 뒤 바로 평범함과 복종의 대표자로 부활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때문인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그녀는 그를 사악하기보다는 평범하고, 고지식하게 명령을 수행하려 애쓴 다소 머리가 둔한 공무원적 인물로 묘사했다. 아렌트는 역사상 최악의 범죄가 이토록 평범한 인물에 의해 수행된 것에 착안하여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창했다.

현직 시절의 아이히만(1942). 위키미디어

아이히만이 평범한 인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게다가 아렌트가 말한 ‘평범함’은 보통 사람의 특출나지 못한 면을 중립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견딜 수 없어 하는 모든 특성의 총합 같은 인상을 준다. 나중에 그녀는 좀 더 힌트를 주었다. “그의 특징은 천박함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는 그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대중화될 수 없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부류에게 ‘평범하다’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렌트 같은 지식인 귀족이 아니라면 말이다.

‘평범함’은 잠시 잊자. 아이히만은 딱히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별 볼일 없이 지내다가 나치당에 가입하고, 동네에서 행동대장 노릇을 좀 하다가 중앙에 불려가서 유대인들을 죽이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의무라서 열심히 한 게 아니라 강렬한 이데올로기적 동기가 있었다. 그런 게 없었다면 나치당에 가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그는 자신을 직무를 수행하는 관료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맬컴 글래드웰에 따르면 그건 조폭들도 흔히 빠지는(그리고 좋아하는) 상상이라고 한다.

사상가들은 악을 추상화하려고 하지만, 악은 그럴수록 알기 어려워진다. 눈에 띄는 것을 덮고, 잘 보이지 않는 것을 핵심이라고 내세우면 그럴 수밖에 없다. 내용이 없어진 개념들이 그렇듯 악의 평범성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적용해도 되는 말이 되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겁주는 말이기 쉬웠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것보다, 악당이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하는 것, 그게 훨씬 두려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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