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술먹고 식당에서 누운 취객, 소방과 경찰 서로 미뤘다
술을 마시고 식당에서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린 채 누워 있는 취객의 처리를 맡을 책임은 경찰관과 119 구급대원 중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최근 서울 양천구의 한 식당에서 이런 상황이 생겼는데 경찰과 소방에서 서로 “우리 책임 아니다”라고 미루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관과 소방대원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1시간 넘게 취객은 바닥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사건은 지난 11일 낮 1시 53분 서울 양천구 신정동 한 중국집에서 “손님이 술을 먹고 안 나가고 있다”는 112 신고에서 시작됐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보니 가게 바닥에 남성이 엎어진 상태로 누워있고 구토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술 취해 행패를 부린다거나 물건을 부수면 연행할 수 있지만 그냥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 있었고, 구토한 걸로 봐서 응급 조치가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현장에 온 경찰은 식당 직원에게 “119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뒤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 뒤 현장에 출동한 119 구급대원은 병원으로 옮길 상황은 아니라고 봤다. 소방 관계자는 “외상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심장박동, 혈압 등을 측정한 결과 모두 정상이었다”고 했다. 구급대원은 오후 2시 3분에 경찰에 공동 대응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출동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 후 구급대원이 112에 잇따라 신고 전화를 걸기 시작하면서 양측의 다툼이 시작됐다. 구급대원은 오후 2시 30분부터 3시 32분까지 9차례나 112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그때까지 술 취한 시민은 식당 바닥에 1시간 30분가량 계속 누워 있는 상태였다. 소방 관계자는 “인적 사항이 없으면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경찰에 신원 확인을 해달라고 요청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실제 119 구조·구급에 관한 법률(119법) 제19조 3항에 따르면 구조 구급대원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 경찰서에 의뢰를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경찰은 “소지품을 확인했지만 지갑이나 신분증 등이 발견되지 않아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고 수차례 설명했다”며 “소방에서 경찰에 사건을 떠넘긴 것”이라고 맞섰다.
구급대원의 잇따른 신고 전화에 경찰 5명이 오후 3시 반쯤 다시 현장에 나타나 “112 전화를 계속 거는 건 업무방해”라며 구급대원과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취객의 주머니를 다시 뒤져 신용카드 한 장을 발견했고, 카드에 적힌 이름을 확인해 구급대원에게 건넸다. 최소한 이름은 파악했으니 병원으로 옮겨달라는 것이었다. 이 취객은 첫 신고 약 세 시간 만인 오후 4시 50분이 되어서야 금천구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다.
경찰과 소방 양쪽 모두 이 사건은 구체적인 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운 애매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경찰 측은 “범죄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4조에 따르면 경찰은 응급 구호가 필요한 경우 119 등에 긴급 구호를 요청하거나 경찰서에서 보호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119법에는 긴급 구호를 요청받은 보건의료기관이나 공공구호기관은 정당한 이유 없이 구호를 거절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도 했다.
반면 소방 측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서울의 한 소방서 관계자는 “2018년 MOU를 맺고 단순히 술에 취한 사람은 처음 신고를 받은 곳에서 처리하기로 했는데 구급대에 떠넘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일반 취객은 경찰서에서 보호 조치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 구급대에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늘었다”며 “코로나로 구급대가 바쁜 상황에서 경찰과 협조가 안 돼 아쉽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경찰과 소방이 다투는 동안 큰 사고로 번질 수도 있었던 만큼 명확한 역할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동훈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혈중알코올농도가 높아 자극에도 반응이 없는 상태에서 구토를 한 경우라면 토사물이 기도를 막을 수 있어 위험하다”며 “그런 경우 바로 병원 이송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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