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코로나 시대, 평면을 뚫고 나온 사람들

한겨레 2021. 12. 22. 12: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코로나 시대와 함께 일상이 된 온라인 비대면 수업은 스크린 바깥에서의 마주침을 외려 낯설게 만들었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 공동취재사진

조문영 ㅣ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링>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오래전이라 내가 본 게 일본판인지 한국 리메이크판인지조차 헷갈리지만, 긴 머리의 여자가 티브이(TV) 화면을 뚫고 밖으로 기어 나오는 장면은 도저히 잊히질 않는다. 시간이 지나 강렬했던 공포는 사라졌지만, 예기치 못한 장면을 마주한 순간의 당혹감은 오래도록 남았다. 2년 가까이 온라인으로 봐온 학생들을 가끔 화면 밖에서 마주치자 난데없이 이 장면이 스쳤다. 코로나 이후 입학한 학생과 첫 면담을 했을 때, 외부 행사에서 과 학생을 우연히 만났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몸이 굳었다. 이들이 스크린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반갑고 미안해야 정상인데 어쩌다 멀쩡한 학생을 귀신으로 둔갑시켰을까. 예상보다 길어진 비대면 수업에 익숙해진 탓일까. 못 만나 아쉽다는 말을 곧잘 내뱉지만, 몸은 이미 재택근무에 길들었다. 외출 준비를 하고, 버스를 타고, 잰걸음으로 강의실로 향하는 수고를 덜자, 의례의 경건함도 사라졌다. 수업 중간의 짧은 휴식을 틈타 밥솥에 쌀을 안친다. 학생들의 몸놀림도 굼떠졌다. 학기 초 활짝 열렸던 비디오 화면은 중반이 지나니 대개가 오프로 바뀌었다.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이름을 부르면 방금 일어나 세수를 못 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얼굴들과 이름들의 패치워크에 제법 익숙해졌을 무렵 발생한 바깥에서의 마주침은, 그래서 낯설고 기이하다. 긴장감, 강렬한 흥미, 희망과 불안, 조급함 등, 백년 전 서구의 인류학자가 원주민 사회를 찾았을 때 쏟아냈던 말들이 외려 친숙하게 와닿는다. 서울의 판자촌 달동네에서 중국 선전의 황량한 공장 지대까지, 현장연구를 시작할 때마다 엄습했던 설렘과 두려움이 불쑥 되살아난다. 연구실, 건물 복도, 신촌 거리 같은 지극히 평범한 장소에서 말이다. 익숙했던 게 불현듯 낯설어지자 감각이 예민해졌다. 연구실을 찾은 학생들의 말, 표정,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적절히 패턴화된 답안 대신 그한테 고유한 조언을 찾고 싶다. 인류학도 다른 학문처럼 간단명료한 개론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새 학기마다 들어온 푸념도 예사롭지 않다. 예전 같으면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장황한 연설을 늘어놨을 텐데 그가 답답한 이유가 뭔지 귀를 쫑긋 세운다.

수도권의 한 대학가 카페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 김혜윤 기자

코로나 바이러스와 2년째 동거 중이다. 물리적인 접촉이 힘들어졌을 때 발생한 물리적 마주침은 때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나한테는 학생들과의 만남이 그랬다. <링>의 장면을 소환할 만큼 당혹스러웠지만, 다행히 <링>을 처음 본 순간처럼 두렵진 않았다. 묘한 긴장감이 익숙한 풍경을 뒤집고 관행을 들쑤시면서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하지만 이 긴장이 견딜 만한 가치가 있게 된 건 얼굴과 이름이 둥둥 뜬 화면에서 말이라도 눈빛이라도 섞은 덕택이 아니었을까. 이 연결 덕분에 유례없이 지저분한 대선 정국을 거치면서 막장이 된 청년 논의와 거리를 두고, 내가 만난 학생들을 ‘이대남·이대녀’, ‘여초·남초’, ‘2030’ 프레임에 기계적으로 연루시킬 위험을 비켜간 게 아닐까.

팬데믹을 거치면서 이런 위험을 피하는 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녹록지 않음을 실감한다. 올여름 ‘선진국’으로 공인받은 나라에서, 장애인들은 여전히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안전하게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길 꿈꾸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일터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정받길 꿈꾸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과 이웃을 환대해도 좋을 최소한의 집을 꿈꾼다.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50% 소득의 14배에 달하는 나라에서(세계불평등보고서 2022), 정부는 예산 부족 운운하고, 기업은 기부로 생색 떨고, 동료 시민은 “나도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장애인, 노동자, 쪽방 주민이 소박한 제 꿈을 알리려고 지하철역에, 거리와 광장에 용기를 내어 출현했을 때, 사람들은 티브이 화면에서 기어 나온 괴물을 본 것처럼 당혹해한다. 이 예기치 못한 사건은 건강한 긴장감을 낳는 대신 공포를, 심지어 혐오를 유발한다. 팬데믹 이후 접촉이 거의 끊긴데다 대부분 언론마저 빈자들의 출현을 감염 위협으로 축소하는 마당에 이들이 프레임 정치에 포획되지 않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누군가는 결국 이랑의 노랫말처럼 ‘이단’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까.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이단이 나타났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