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인간의 역병

한겨레 2021. 12. 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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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아일랜드 대기근 때 정치인들이 외쳤던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적절한 순간이 있을까. 먹고살게 하는 정책도 마찬가지다. 방역으로 영업을 제한하면, 마땅한 보상조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땅을 빼앗긴 뒤 감자 심어 연명하다가 감자 역병을 맞은 사람에게 왜 감자만 심었냐고 타박했던 19세기 영국인들과 다를 바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역사상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에서 기근이 생긴 적은 없다”는 말로 유명하다. 선거철만 되면 나오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볼멘 질문에 이보다 명징한 답은 없을 것이다.

이 유명한 언설의 역사적 사례는 많지만, 센은 대표적인 것으로 18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 역병을 들었다. 미국 동부에서 시작된 역병은 미국을 순식간에 휩쓸고 배를 타고 아일랜드로 넘어왔다. 확산 속도와 범위가 엄청나서, 역병을 피한 감자농장은 드물었다. 감자 수확량이 적게는 30%, 많게는 50% 줄어들었다.

아일랜드에서 감자는 생명줄이었다.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땅을 강제로 몰수하면서 아일랜드인은 대부분 소작인이 되었다. 손바닥만한 땅에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예전처럼 밀을 심고 목축을 할 수 없었다. 그 대안으로 감자 농사가 도입되었다. 지배층도 지배전략의 일환으로 부추겼다. 가난과 빈부격차가 워낙 심했으니, 모든 것이 감자로 쏠렸다. 감자밭에서 일하고 삶은 감자로 한끼를 때우는 ‘감자 경제’였다. 인구도 급속히 늘었다. 맬서스의 악명 높은 <인구론>도 상당 부분 아일랜드에 근거한 것인데, 그는 감자가 없었다면 인구가 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감자 역병은 소득의 위기이자 식탁의 위기였다. 사실 대재앙이었다. 인구 800만명 남짓한 나라에서 100만명이 굶어 죽고 100만명이 굶주림을 못 견디고 다른 나라로 떠났다. 역사책은 “아일랜드 대기근”이라고 기록했다. 수없이 많은 아일랜드 가족들이 창백하고 지친 모습으로 미국 뉴욕항에 발을 내디디던 때였다.

감자 역병에서 이런 역사적 대참사가 시작되었지만, 기근과 굶주림은 인간이 빚어낸 또다른 역병 때문이었다. 아일랜드는 당시 영국의 일부였고, 의회에 아일랜드 대표도 있었다. 고통받는 아일랜드를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덕분에 감자 역병 초기에는 영국 정부가 나서서 밀을 보내고 다른 구호 조치도 취했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굶어 죽는 최악의 상황은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다.

그때 정권이 바뀌었다. 이른바 자유방임의 기치를 높이 든 정부가 들어섰다. 정책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직접적 구호·지원이 아니라, ‘감자 중심’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운송 인프라를 확충하며 고용을 늘리면서 아일랜드인이 직접 번 돈으로 식량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감자 경제’가 잉글랜드의 ‘식민정책’의 결과물인 점도 간단히 무시했다. 아일랜드인들의 고통의 목소리는 영국 의회에 전달되지 못했다.

이런 정책 변화와 함께 식량위기의 원인에 대한 진단도 슬그머니 달라졌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식을 많이 낳은 무책임함 때문이라는 맬서스적 진단은 그나마 나았다. 원색적인 주장이 쏟아졌다. 잉글랜드에서 빈곤은 경기순환과 관련된 것이지만 아일랜드의 빈곤은 기본적으로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당장의 고통 완화가 아니라 인간 교화활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게으름과 자업자득의 신화는 인간이 실패한 역사적 사건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심지어 요리에 대해 비평할 처지가 못 되는 잉글랜드의 정치인들은 아일랜드에 감자를 삶는 것 말고는 요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비아냥댔다. 피해자를 비난하여 사태를 무마하는 전형적 수법이었다. 그렇게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상처도 깊어졌고, 향후 참혹한 폭력의 씨앗도 뿌려졌다.

한가지 더 있다. 이 역사적 비극의 주연은 정치인들만은 아니었다. 경제관료의 역할도 상당했다. 대표적 인물이 찰스 트리벨리언이다. 그는 대기근 시기에 아일랜드 구호정책을 총괄하는 차관보였는데, 처음부터 일관되게 구호 반대론을 외쳤다. 최고위직 경제관료로서 자유방임적 경제철학과 엄격한 재정건전성을 확고하게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복음주의적 기독교주의와 통합시켰다.

그는 시장은 곧 신의 뜻이라는 경지에 도달했고, 그 심오한 경지를 아일랜드에 철저하게 적용했다. 신의 섭리를 가난한 자들이 알기 어려운 것이니, 신은 굶주림을 통해 아일랜드인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한다고 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고통을 해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해악을 일소할 것을 주장했다. 빵을 줄 것이 아니라 채찍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정책이 종교적 신념이 되었으니,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정치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채찍정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언론에 알렸다. 언론도 열광했다. 그의 정책은 파국적 결과를 낳았지만, 그는 승승장구했다.

두 세기 전의 일을 새삼스레 떠올린 까닭은 역병이 결국 인간의 역병으로 귀결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감자 역병은 감자의 일이었는데, 이 일로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은 사람 때문이었다. 대책과 정책, 그리고 그 뒤에 깔린 이해관계, 신념으로 포장된 편견 때문이었다. 인간 사이에 이미 떠돌고 있던 역병이 사물 세계의 역병을 만나 인간의 고통을 증폭하고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상도 많이 다르지 않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완충책은 될 수 있는 백신이 개발되었을 때, ‘백신 박애주의’의 요구는 높았다. 모두가 안전하지 않을 때까지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구호를 너나없이 외쳤다. 하지만 백신 공급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백신 제국주의’가 대세였다. 한쪽은 백신이 넘치고 다른 한쪽은 백신을 구한다고 아우성이었다. 그 결과, 아우성치던 곳에서는 바이러스가 활력을 더해 변이가 만들어졌고, 백신이 넘치는 곳으로 지금 퍼져가고 있다. 한때 백신의 희망으로 들떴던 유럽은 이제 다시 봉쇄의 길로 들어섰다. 아일랜드 대기근 때 정치인들이 외쳤던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적절한 순간이 있을까.

먹고살게 하는 정책도 마찬가지다. 방역으로 영업을 제한하면, 마땅한 보상조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땅을 빼앗긴 뒤 감자 심어 연명하다가 감자 역병을 맞은 사람에게 왜 감자만 심었냐고 타박했던 19세기 영국인들과 다를 바 없다. 감염자 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공공 의료체계에 과감하게 투자해서 대처능력을 키워야 한다. 희생, 헌신, 협조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통을 통한 극복을 외친 19세기 복음주의 경제정책과 다를 바 없다.

아마르티아 센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거리를 대기근의 이유로 보았다. 멀리 있는 고통은 적극적 공감과 정책 대상이 아니라 통제 대상이다. 오늘날 이 ‘정치적’ 거리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불평등한 공간은 이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곳들을 무수히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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