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우리 시대의 외설동화

2021. 12. 2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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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왕'·'빨간구두' 추종자
21세기 버전 전체주의 만들어
'오겜'도 양극화 사회 투영 공감
본질 흐리고 과장 땐 잔혹동화로

우리는 ‘벌거벗은 왕’의 시대, ‘빨간구두’를 욕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왕은 도처에 있다. 권력을 쥐고, 추앙자를 거느리며,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 모두 왕이다. 왕은 자신이 완벽한 옷을 입고 있다고 외친다.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다. 자신만이 특별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믿는 탐욕과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왕의 주변엔 빨간구두를 신은 자들이 춤추고 있다. 이들은 종내 빨간구두를 벗을 수 없다고 간주한다.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들을 춤추게 한다고 믿는다.

그들도 왕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왕이 신비로운 옷을 입었다는 집단기만에 동참한다. 진실을 말하면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폭력의 타깃이 된다. 권력이 진실을 누른다. 진실을 억압하는 권력은 위험하다. 국민을 선동하는 가장 저열한 방식이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작동한다.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 믿는 듯이 행동하는 것으로. 왕이 진실하지 않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그 자리’에 있으므로 그를 ‘믿는다’고 믿는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빨간구두를 신은 자들은 춤을 멈출 수 없다. 멈추려면 발목을 잘라내야 한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빨간구두를 한번 신으면 춤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빨간구두를 욕망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진짜 문제는 구두가 벗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구두를 벗고 싶어 하지 않는 욕망에 있다. ‘벗고 싶지 않다’를 ‘벗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전가시키는 것이다. 빨간구두의 저주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빨간구두를 욕망했고, 그 욕망을 감춰 줄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벌거벗은 왕과 빨간구두를 신은 추종자가 모여서 21세기 버전의 전체주의가 된다. 빨간구두가 왕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공동운명체가 아니다. 각자의 욕망을 추구할 뿐이다. 그 욕망에 이르기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무한히 주어진 자유, 자발적 추종이 더 강력한 전체주의를 만든다. 이들에게는 이념이 없다. 욕망과 물신(物神·fetish)이 있을 뿐.

우리 또한 진실을 알면서도 벌거벗은 왕에, 그 빨간구두에게 둔감해진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냉소주의는 현실 인식이 왜곡돼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왜곡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20세기 마르크스의 공식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였지만, 21세기 냉소주의의 공식은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이다. 냉소주의는 벌거벗은 왕과 빨간구두를 더 득세하게 한다.

팬데믹의 위기 속에서도 왕과 빨간구두의 행렬이 지속된다. 팬데믹은 인간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식시켰다. 우리가 취약하기 때문에 서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도 각인시켰다. ‘나’는 ‘나’가 아니고 ‘너와 나의 사이’라고 말한 주디스 버틀러의 말이 간절하게 다가온다. 이 상황에서,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취약한 인간이 자신의 역능을 과시하며 대중 앞에서 확언하는 것은 슬픈 허영이다. 자신의 취약성을 모르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왕과 빨간구두는 자신들만은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는 듯하다. 바이러스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할 텐데, 그들은 자신의 취약함에 대해서만은 무지하다. 그 무지는 권력과 오만에서 온다.

이 코로나가 어떻게 될까 하는 의혹은 우리를 강박증으로 몰아넣고 있다. 전인류가 신경증적 불안에 휩싸여 있다. 이 불안은 우울, 분노와 연동한다. 왜 세계가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에 열광할까. 불안, 우울, 분노 때문이다. 우리가 빌런(악당 캐릭터)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 캐릭터에 우리의 감정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과 ‘지옥’은 초자본주의 초양극화가 만든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외설동화이다. 모든 것이 양극화됐다. 돈, 권력, 정보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오징어 게임’과 ‘지옥’의 원형이 되는 서사가 ‘벌거벗은 왕’과 ‘빨간구두’이다. 외설동화는 쉽게 잔혹동화가 된다. 본질을 흐리고 과잉과 과장으로 무람없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이야기는 피와 광기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동화의 결말은 어떤가. 왕이 벌거벗었다고 외친 자가 있었다. 한 ‘소년’이었다. 외침이 있었지만 반향은 없었다. 왕은 그대로 행차를 계속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빨간구두의 그 소녀는 자기 발목을 잘랐다. 그런데도 소녀와 분리된 구두는 여전히 춤을 추며 걷지 못하게 된 소녀를 유혹했다. 이것은 마치 세계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전언처럼 읽힌다. 그러나 이 동화에도 분명 진실을 외친 소년과 거짓된 욕망을 벗어던진 소녀가 있었다. 그 한 명이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이 동화들은 이렇게도 읽힌다. 희망은 청년에게 있다고.

왕은 어떻게 되었나. 벌거벗은 왕은 소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닌 척, 못 들은 척, 행차를 중단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정면돌파가 아니라 포퓰리스트의 외설이다. 그 옆에 수행원들이 빨간구두 위에 올라타고 더 외설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 수행원들도 왕이 소년의 말을 들었다는 것을 안다. 바로 그 때문에 더 뭉친다. 이제 두려움이 그들의 동력이다. 그러나, 빨간구두를 버리고 그 대열에서 이탈한 이도 있다. 진실은 그들의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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