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린 시절 아픈 기억은 평생 간다

2021. 12. 13.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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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억들이 있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수돗가에서 물로 배를 채웠던 기억, 기성회비를 못 내서 학교에서 쫓겨나던 기억,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 학교게시판에 매주 공개했던 학생들의 저축 막대그래프 중 가장 낮은 나의 그래프를 보며 창피했던 기억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기억은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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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억들이 있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수돗가에서 물로 배를 채웠던 기억, 기성회비를 못 내서 학교에서 쫓겨나던 기억,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 학교게시판에 매주 공개했던 학생들의 저축 막대그래프 중 가장 낮은 나의 그래프를 보며 창피했던 기억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기억은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었던 일이다. 당시 공원 근처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있었다. 나도 급식소를 찾아가는 날이 종종 있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릴 때 그 창피함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주 짧은 기다림이었지만 그 순간이 너무 부끄러워 무료급식소에 가지 않은 날도 있었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흐릿해질 만큼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초등학교나 무료급식소를 지날 때면 당시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지곤 한다.

올해 9월 국민권익위는 약 31만명의 결식우려아동을 위한 아동급식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해 보건복지부와 각 지방자치단체에 권고했다. 성장기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주변 급식카드 가맹 음식점 위치를 몰라서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차별화된 카드디자인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 급식카드를 꺼내기 창피해하고 눈치를 보다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국민권익위는 급식카드 디자인을 일반카드와 같은 모양으로 바꿔 아이들이 카드를 사용할 때 낙인감이 들지 않도록 했다. 또 네이버, 카카오와 협업해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쉽게 급식카드 가맹 음식점을 확인해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정희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이번 제도 개선에서 가장 고려했던 부분은 감수성이 민감한 시기의 아이들이 급식카드를 사용할 때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태조사 과정에서 한 지방자치단체의 아동급식 업무 담당자는 “급식카드 디자인을 바꾸려면 예산이 드는데 카드 모양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돈만 많이 넣어주면 되는 것 아닌가”라며 반문했다고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그의 저서 ‘낙인(Stigma)’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부정적 고정관념인 ‘낙인’이 개인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개인은 자신을 향한 부정적 시선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부담과 압박을 받아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또 사회 소외계층의 낙인감은 가진 자에 대한 증오와 불만으로 표출돼 사회 전반의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직자는 하나의 정책이 정책 대상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방면에서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배고픔보다도 자신의 가난과 배고픔에 대한 주변의 시선임을 파악하고 아이들이 주변의 시선에 다치지 않고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세심함이 공직자가 갖춰야 할 진정한 덕목일 것이다. 이번 제도 개선으로 결식아동 급식제도가 아이들이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따뜻한 한 끼의 식사로 정착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어린 시절 무료급식소에서 느꼈던,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창피함을 지금의 아이들은 떠올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정희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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