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Ⅱ 20번 '풀 수 있다'는 평가원에 '수학적 모순' 정면 반박한 유전학 석학

서동준 기자 2021. 12. 1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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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학년도 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 오류 논란에 해외석학까지 가세하며 사태가 더욱 커지고 있다.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 유전생물학과 교수팀은 “문제 설정 자체가 모순”이라며 “일부 답을 찾을 방법은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무시해야만 하는 부분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해당 문항은 올해 단일문항으로는 가장 많은 이의제기를 받으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집단유전학 분야의 문제인데 두 개의 동물 집단 중 특정 유전학 법칙에 부합하는 동물 집단을 찾고, 집단별 유전자 비율을 추론해야 한다. 추론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3개의 보기 중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생명과학Ⅱ 내용을 적용하면 정답이 5번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는 있다. 

이의제기하고 있는 수험생들은 풀이 과정에서 문제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전자형 비율은 비율이므로 0~1 사이의 값을 가져야 하는데, 총 12가지 유전자형 중 하나는 1.2, 하나는 –0.4의 값이 나온다는 것이다. 20번 문항에서 이 둘의 값을 구하라고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문제에서 구하라고 한 유전자형 비율이 맞는지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값을 도출해봐야 한다. 

쉽게 예를 들자면 A, B, C라는 3명의 학생이 각자 사과를 들고 있다고 했을 때 A와 B가 각각 전체의 몇 %씩 들고 있는지 알아내는 문제가 있다. 조건에 따라 추론했을 때 A가 80%, B가 60% 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것이 정답이었다. 그런데 이 경우 C는 –40%를 들고 있어야 한다.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오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같은 모순을 확인한 수험생들은 문제가 아닌 자신의 풀이에 오류가 있다고 의심했고, 여기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토로했다. 이에 따라 일부 수험생들은 20번 문항을 무효 처리해달라고 평가원에 요청했다. 

수능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제기한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의 첫 변론 기일이 열린 10일 오후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재판을 마친 수험생과 소송대리인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하지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지난달 29일 ‘이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을 준거로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고 판단한다’며 문제에 이상이 없다고 결론을 냈다. 이에 수험생 92명은 2일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며, 법원이 9일 정답 결정의 효력을 정지하라는 판결을 내놓으며 10일 수능 성적표의 생명과학Ⅱ는 공란으로 배부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번 소송의 1심 재판 결과가 이달 17일 선고 예정인 가운데, 프리처드 교수가 소송인단에 의견서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프리처드 교수는 현재 통계와 계산으로 유전체와 진화 생물학을 연구하고 있어, 논란이 된 문항에 가장 적합한 연구자라 할 수 있다.

프리처드 교수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 매튜 아기레 미국 스탠퍼드대 의생명정보학부 박사과정 연구원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20번 문항의 풀이과정을 상세히 공개하고, 모순인 이유를 밝혔다.

아기레 연구원은 두 가지 방법으로 풀이했으며, 그중 하나로 수험생들이 제기한 것처럼 유전자 비율이 0~1 사이가 아닌 값이 나옴을 보였다. 추가로 또 다른 풀이방법을 제시했는데, 문제풀이를 할 수조차 없도록 문제 설정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평가원이 ‘답은 낼 수 있는 문제’라고 한 것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프리처드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집단유전학, 중대한 대학입학시험, 수학적 모순, 법원의 명령까지 모든 요소를 다 갖춘 문제”라고 총평했다. 김종일 서울대 유전체의학연구소장 겸 의과대학 교수도 여러 국내언론을 통해 “오류가 명백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평가원이 한 가지 문제 풀이만을 강제하고, 그 안에서 답만 찾기를 강요한다는 비판 속에서 법원의 판결에 귀추가 주목된다.

[서동준 기자 bi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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