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 앞 아파트' 건설사의 '문화재위 패싱'..장기 소송전 불가피

노형석 2021. 12. 1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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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 2곳, 심의 신청 철회하고 소송전 예고
법원, 공사중지 명령 집행정지 소송서 건설사 손 들어줘
경기도 김포시 장릉 봉분 앞 전경. 봉분 앞 혼유석과 장명등 너머로 펼쳐진 경관을 장벽 같은 고층 아파트들이 가로막고 있다. 노형석 기자

나라의 문화유산 보존 방향을 정하는 최고 의결기구가 ‘패싱’을 당하고 ‘무용지물’이 됐다. 한국 문화유산 보존의 최후 보루로 꼽혀온 문화재위원회의 권위와 위상이 통째로 흔들리는 전례 없는 사태에 문화재 동네와 문화재청은 충격에 빠졌다.

반기를 든 주역은 건설업체들이다. 세계유산 조선 왕릉의 일부인 경기도 김포 장릉 앞에 고층 아파트 10여동을 장벽처럼 건립해온 대광이엔씨와 제이에스글로벌은 공사의 적절성을 가리려는 문화재위의 현상 변경 심의를 아예 거부해버렸다.

업체들은 2019년부터 문화재청과 협의 없이 건물을 짓다가 지난 7월 뒤늦게 공사가 불법이라고 판단한 문화재청의 공사 중지 명령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2017년 1월 김포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의 반경 500m 안 역사문화환경보호구역 안에 짓는 높이 20m 이상 건축물은 개별 심의한다고 관보에 고시했으나, 건설사들은 그 뒤 고층 아파트 공사를 시작하면서 심의를 받지 않았다.

문화재청의 고발 조치가 이어지자 업체들은 뒤늦게 8월에 현상 변경 심의를 문화재위에 신청했다. 그러나 8월과 10월 열린 문화재위 회의에서 자신들의 신청안에 보류 결정이 거푸 내려지자 지난 9일 예정됐던 3차 회의를 앞두고 이들은 전날 갑자기 심의 신청을 철회하는 초강수를 던졌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정이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은 문화재위 심의를 무시하고, 법원에 소송을 내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문화재청이 세계유산 조선왕릉을 알리기 위해 만든 전용 누리집의 김포 장릉 사진. 능역 앞에 대형 아파트 숲이 들어서기 전에 찍은 것이다. 전방에 계양산과 세계유산 등재 전인 2000년대 초반 지어진 삼성아파트 건물이 보인다. 누리집 갈무리

문화재위는 9일 심의 신청을 철회하지 않은 대방건설에 한해 아파트 상층부 일부를 철거하는 개선안을 다시 제출하라며 보류 결정을 내렸지만, 다른 2개 업체의 심의 철회로 결정 내용은 반쪽이 됐다. 문화재위는 장릉 아파트 건립 건과 관련해 문화재청이나 다른 정부기관의 특별한 요청이 없는 한 후속 심의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1964년 문교부 자문기구로 출범한 이래 문화재위가 심의를 사실상 거부당하고 의결 기능을 상실한 것은 전례가 없다. 문화재위는 국내 문화유산 주변의 재개발을 막는 가장 중요한 방파제 구실을 해왔다. 2003년 경부고속철도 노선을 경주 외곽 통과로 바꾼 결정을 내렸고, 2005년 서울 도심 옛 경운궁(덕수궁) 선원전 터에 지으려던 주한미국대사관 신축 건도 역사 유적이 있다는 이유로 불가 판정을 내렸다.

이런 내력을 뒤엎은 업체들의 심의 철회로 문화재청이 자체적으로 철거, 부분 철거 등 행정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미 위법 소지가 있다고 보고 경찰에 고발한 만큼 자체 판단으로 대응조치를 할 수 있다는 게 문화재청 보수정비과 쪽의 설명이다. 하지만 건설업체들이 곧바로 소송을 내며 대응할 것으로 보여 장기간 법정공방이 불가피하다.

김포 장릉의 능역을 지키고 서 있는 석물들. 석물과 아래쪽 제실 너머로 장벽처럼 경관을 가로막는 고층 아파트들의 모습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일단 현재 상황은 건설사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10일 건설사 대광이엔씨와 제이에스글로벌이 ‘문화재청의 공사 중지 명령의 효력을 멈춰달라’며 낸 집행정지 항고 사건에서 건설사 쪽 손을 들어줬다. “아파트와 관련된 수분양자들, 시공사 및 하도급 공사업체 등과 계약 관계에서 파생되는 복잡한 법률적 분쟁에 휘말려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될 우려가 있고, 준공을 기다리면서 임시로 다른 곳에 거주해야 할 수분양자들이 입을 재산적·정신적 손해 또한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이유에서다. 세계유산이자 역사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 이전에 분양받은 입주민과 건설업주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 대변인실 쪽은 “조만간 신속하게 항고 등 대응방침을 정할 것”이라고 알렸다. ‘장릉 앞 아파트’를 공사 일정대로 존속시킬지, 부분 철거할지 등 향후 방향에 따라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에 법원 쪽의 고심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도성 주위 10~60㎞ 사이에 분포된 조선 왕릉들은 상당수가 수도권 택지개발 지구와 겹쳐 개발 논란에 휩싸일 소지가 다분하다. 장릉 사태의 파장이 또 다른 현안인 서울 태릉·의릉 지구 등의 재개발 조망권 논란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의 책임도 지적하고 있다. 조선 왕릉이 2009년 세계유산에 지정된 직후부터 주변의 재개발 가능성 등 경관 관리 방안과 감시 시스템 확보 등에 신경을 쓰고 대책을 세워야 했는데도 대책을 등한시하다 장릉 앞 아파트가 거의 올라가고 나서야 뒤늦게 문제를 발견하고 재심의를 요구하는 비극적 상황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문화유산 복원사를 연구해온 한 전문가는 “장릉 관리소 직원이 20명이 넘는데도 지난 5월 업무 협의차 찾아온 문화재청 유적정비과의 다른 직원이 장릉 앞 아파트 건립 현장을 보고 문제점을 발견했다는 것은 관리 시스템의 큰 허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짚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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