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근무 北 공작원은 냉난방 전문가..유사시 독가스 살포할 작정"

강소영 2021. 12. 1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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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온라인판 뉴스 화면 캡처
 
북한군 정찰총국 대좌(대령) 출신 김국성 씨는 지난 10월 영국 BBC와 인터뷰를 진행할 당시 “1990년대 초 북한 간첩이 청와대에 근무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비서관이나 행정관이 아닌 냉난방 기술자였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앞서 정찰총국과 노동당 작전부, 그리고 35호실과 대외연락부 등에서 일했다는 김 씨는 지난 11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정치 예속화’를 목표로 일했다”면서 “지도자의 눈과 귀, 두뇌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김 씨는 “직접 대남간첩을 육성해서 그를 통해서 공작 임무를 수행한 것이 여러 건 된다”며 “한국 청와대에도 북한에서 파견한 직파공작원 한 명이 근무하고 무사히 북한으로 복귀한 사례도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해당 공작원은) 청와대에 5~6년 근무하고 무사히 복귀해 들어와서 노동당 314 연락소에서 일했다”며 “남파공작원이 남한 구석구석 중요한 기관들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여러 곳에서 맹활약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앞서 국가정보원은 이같은 김 씨의 발언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한 바, 김 씨는 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치며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더욱 자세한 실상을 전했다.

김 씨는 “북한 공작원의 청와대 근무는 분명한 사실”이라며 “박명수(당시 직파공작원)로 알고 있는 이 사람은 1976년 한국으로 직파 된 첫 부부 공작조 중 한 짝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1994년 북으로 복귀했다”고 설명했다.

김 씨에 따르면, 당시 직파공작원이던 박명수는 기술 업종, 그중에서도 공조 계통을 담당하는 일을 했으며, 냉난방을 담당하는 공조 기술자의 일 특성상 건물의 구조를 다 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청와대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김 씨는 “유사시 공조 시스템을 통해 독가스 살포 같은 테러를 벌여 폭삭 내려 앉힐 수 있다”면서 “이 공로로 박명수는 평양 귀환 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문수동에 아파트도 배정받았다고”도 덧붙였다.

아울러 김 씨는 지난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후에도 그를 암살하기 위한 북한 정찰총국의 공작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김 씨는 “황 전 비서가 자연사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김정은과 북한 공작부서의 확고한 입장이었다”면서 “김정은이 후계자로 부상하던 시점인 2009년 2월 정찰총국이 처음 무어졌고(‘조직됐다’는 의미) 2009년 5월에 첫 번째 공작 임무로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시도는 이듬해 10월 황 전 비서가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며 중단됐다.

군사교육 간부대회 주관하는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그렇다면 북한 내부 정보에 능통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김 씨는 왜 한국행을 택했을까. 

북한에서 대외연락부 6년, 작전부 10년, 35호실 5년, 정찰총국 5년 근무하며 인정받은 그는 탈북의 결정적 동기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몰락을 꼽았다.

당시 장성택은 김정은 집권 초기 후견인 역할을 하며 최고 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2013년 12월 국가전복음모(북한 형법 60조) 등의 혐의로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처형됐다.

이에 대해 김 씨는 “장 부장과 30년 지기로 형, 동생 해온 사이인데 그의 처단을 접하며 내 운명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란 걸 절감했다”며 “장성택의 여독(餘毒)으로 간주된다면 평양으로 돌아가도 혈육과 친지들이 다칠 것이고,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고 털어놓았다.

망명 후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2년 근무 후 퇴직해 현재 수입이 끊겼다는 그는 가끔 북한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김 씨는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는 없다. 앞으로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 여생을 바칠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70년 넘게 ‘인민을 위해 복무함’이란 구호를 내세웠지만 위선에 그쳤다. 지금의 방식은 독재밖에 안 된다”고 시사저널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내비쳤다.

강소영 온라인 뉴스 기자 writerk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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