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당신이 잠든 사이엔 '도둑눈'이 내린다
[경향신문]
“간밤 잠든 사이에 함박눈이 소복이 쌓였다”는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바른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 함박눈은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눈”인데, 쌓인 눈만 보고서 내린 눈의 양상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에 자리한 우리나라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그럼에도 눈의 이름들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 고작 아는 것이 함박눈뿐이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적은 탓이다. 그러다 보니 ‘흰 눈이 내린다’는, 조금은 우스운 표현도 많이 쓴다. 눈은 원래 하얗다. 검은 눈, 파란 눈, 노란 눈은 없다. 세계 어디든 하얀 눈만 내린다. 그것을 굳이 흰 눈이 온다고 쓸 까닭은 없다. 이 또한 눈의 다양한 이름들을 모르는 탓이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집을 슬쩍 다녀간 낯선 사람, 그는 도둑일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밤사이 사람들이 모르게 내린 눈”은 ‘도둑눈(도적눈)’이다. 밤에 내렸으니 ‘밤눈’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밤새 내려 “누구도 밟지 않고 내린 상태 그대로 쌓여 있는 깨끗한 눈”은 ‘숫눈’이다. 숫총각·숫처녀처럼 ‘숫’은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한”의 뜻을 더한다. 숫눈은 ‘생눈’이라고도 하며, 숫눈이나 생눈이 “쌓이고 다져져서 잘 녹지 않는 눈”은 ‘쇠눈’이다. 어느 날 나는 분명 눈을 맞았는데, 옆 동네 친구는 보지 못한 눈도 있다. 그런 눈은 ‘풋눈’이다. 풋사과·풋사랑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풋’은 “덜 익은”의 뜻을 더한다.
눈 중에는 비와 닮은 것도 있다.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가 ‘소나기’이니, 그렇게 내리는 눈은 ‘소나기눈(소낙눈)’이다. 가늘게 조금 내리는 ‘가랑비’가 있으니 ‘가랑눈’도 있다. 눈이 내린 양에 따라 자국눈(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눈), 발등눈(발등이 빠질 정도로 내린 눈), 길눈(한 길이 될 만큼 쌓인 눈)으로 나뉘기도 한다.
눈 이름 같지 않은 눈도 있다. 말 속에 ‘비’가 들어가 있는 진눈깨비 역시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고, ‘싸라기’는 “쌀알 같은 눈”이다. ‘싸라기’를 ‘싸래기’로 쓰는 일도 흔한데, 바른 표기가 아니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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