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재벌2세 경영인이 부닥치는 3개의 벽

김덕한 기획부장 2021. 12. 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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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비교에 2~3세들 ‘주눅’
벽 뒤에 숨어 쉬운 일에만 몰두
1세대가 도전하고 넘어섰던 벽
또 다시 깨뜨리는 기업인 나와야

몇 년 전 한 재벌 2세의 토로가 지금도 때때로 떠오른다. 2~3세 오너 경영인들은 세 가지 벽에 부닥친다고 했다. 아버지의 벽, 전문경영인의 벽, 자기 자신의 벽. 아버지의 벽은 자기 나이에 아버지가 뭘 했는지를 자꾸 떠올리게 되면서 느끼는 벽이다. 20~30대에 창업하고, 40~50대에 재계 대표 기업으로 키운 아버지를 생각하면 주눅 들고 쪼그라든다.

자신보다 학벌도, 능력도 더 나아 보이는 전문경영인은 마음에 안 들면 ‘잘라’버릴 수 있고, 귀찮은 일을 떠넘겨 버릴 수 있는 존재이지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전문경영인의 벽이다.

자기 자신의 벽에는 ‘내가 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순간 부지불식중에 갇히게 된다. 오너가 낸 아이디어와 상품은 무리를 해서라도 잘되도록 밀어붙이게 돼 있다. 그게 진짜 성공인 줄 착각하는 벽에 갇히면 회사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골병이 들게 된다.

이런 벽들을 극복할 자질을 보여주는 재벌 2·3세 경영인이 얼마나 될까 문득문득 생각하게 된다. 초고속 성장의 시대가 막을 내렸는데 선대의 눈부신 성과와 자신의 현실을 직접 견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버지의 벽 뒤에 숨어 대리인만 내세우고, 쉽게 돈 되는 사업에 안주하려는 오너 2·3세가 늘고 있다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우리를 이만큼 일으켜 세운 기업가 정신과 야성의 쇠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업의 감사 선임 때 지분이 아무리 많더라도 주총 행사 지분을 3%로 제한하는 ‘3% 룰’이나, 산재 사고 발생 때 원청 회사의 대표이사까지 1년 이상 징역을 살게 하는 중대재해보호법 같은 법률이 거대 여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할 때 오너들은 조용했다. 기업 비밀이 외국 경쟁 기업에 유출되고, 기업 활동과 고용이 위축될 것이라는 주장은 대리인들인 경제 단체만 했다. 국민과 소통하고 설득하려는 오너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1세대 기업인들은 정경 유착과 특혜 성장이라는 비난을 들어왔을지언정 무작정 숨지는 않았다. 기업이 성장해야 나라와 국민이 함께 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졌다. 파업으로 아수라장이 된 작업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설득에 나섰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나, 여러 인터뷰에서 기업 보국을 외쳤던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같은 기업인들은 지금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 재벌 2~3세들의 대화법은 지나치게 부드럽다. 자신의 구멍 난 양말까지 트위터에 올렸던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이나, 72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모으며 스타급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경영 아이디어 경연 TV 프로그램 패널로 참여하는 최태원 SK 회장 등 대중과 소통하려는 경영인들이 없지 않다.

줄 잘못 섰다간 회사가 수십 번 압수 수색당하고 몇 번씩 구속되는 정치 우위의 사회에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겠지만 기업인들에게 기대하는 말은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반(反)기업적 선동의 득세에 맞서 기업의 역할과 가치,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사회로 만들겠다는 의미 있는 메시지와 역할을 국민들은 기다리고 있다. 지나친 정치화, 이념화로 양분된 사회에 대한 해법과 미래 세대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 역시 상당 부분 이들의 몫이다.

미국 기업인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초기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이민 제한 정책이 반기업적이라며 맞섰다.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그런 당당함이 세계 최대 경제 대국 미국을 5% 이상 성장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우리 기업의 힘, 기업가의 영향력은 1세대 기업인들이 분투했던 시절보다 훨씬 커졌다. 그러나 창업 1세대들의 벽을 넘어서는 건 회사 크기와 돈벌이로만 평가받을 수 없다. 1세대들이 도전하고 넘어섰던 벽을 또다시 깨뜨리는 기업인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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