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칼럼] 부부의 동상이몽 '워라밸'

2021. 12. 1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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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녀 출산 꺼리는 부부들
"취미 못즐겨" "경력 단절 두려움"
남편·아내 미묘한 온도차 보여
간극 해소돼야 출산율 제고될 듯

5년여 전 일로 기억된다. 국내 대기업의 신임 임원교육에서 당시 유행하던 신세대 용어의 뜻을 묻는 간단한 퀴즈를 실시했다고 한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다) 등과 함께 워라밸이 출제(?)되었는데, 퀴즈를 모두 맞힌 임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후일담을 전해 들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워라밸은 워크 라이프 밸런스의 축약어로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함은 우리네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워라밸이 일상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 전, 직장인을 대상으로 ‘당신의 삶에서 가족과 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응답 패턴이 젠더보다는 세대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던 결과는 지금 보아도 흥미롭다. 워라밸은 젠더 이슈라기보다는 세대 이슈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란 해석이 이어졌다. 실제로 중장년층은 ‘일이 가족보다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이 ‘가족이 일보다 중요하다’는 응답보다 근소한 차이이긴 하나 다소 높게 나타났다. 반면 청년층은 ‘가족이 일보다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코로나19 이전인 2018년 실시된 조사에서도 워라밸은 세대 이슈임이 확인되었다. 곧 ‘일과 개인생활(life) 중에서 나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을 굳이 선택하자면 개인생활이다’란 항목에 동의하는 비율이 신세대는 80%로 압도적 다수를 기록한 반면, 기성세대는 54%로 나타났다. 2014년에도 동일한 설문 항목이 포함됐었는데 찬성률을 비교해 보면 신세대가 65%, 기성세대가 42%로 역시 세대 간 의미 있는 차이를 보여준 바 있다.

이들 워라밸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놓고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물었다. “기성세대는 입사 이후 지금까지 워크가 라이프이고 라이프가 워크였다. 지금 신세대들이 주장하는 워라밸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이 우문(愚問)을 향해 신세대는 현답(賢答)을 들려주었다. “신세대에게는 워크를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라이프가 필요합니다. 단 라이프의 의미는 개인별로 다양할 겁니다”라고.

그런데 최근 워라밸의 의미가 젠더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면접결과를 접했다. 현재 1명의 자녀를 출산한 부부를 대상으로 둘째 자녀를 출산할 의지가 있는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혹 둘째 출산 의지가 있음에도 출산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주제로 심층면접을 실시했다.

심층면접 결과 속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이유들이 열거되었다.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는 걱정, 날로 치솟는 사교육비 부담에 대한 염려 등과 함께 일부 여성들은 만혼과 노산(老産)으로 지금은 임신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더불어 워라밸 유지의 어려움이 지목되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맞벌이 부부의 미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온도차가 감지되었다.

곧 부인 입장에서 둘째 자녀를 출산할 경우의 워라밸 이슈는 경력단절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부터 아이가 둘이 될 때 돌봄노동의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고민과 연계되어 나타났다. 반면 남편 입장에서는 둘째 자녀가 태어나게 되면 등산이나 골프 등 취미생활을 양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 직장 회식이나 사회생활의 연장인 네트워킹 활동에 제약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점, 자신이 누리던 자유가 대폭 축소될지도 모른다는 점 등을 이유로 내세우며 둘째를 원치 않는다는 속내를 고백하고 있었다. 부부간 이견이 없으리라 예상했던 워라밸을 둘러싸고 부부간 동상이몽에 빠져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결혼 전부터 두 명의 자녀를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남편들만이 둘째 출산에 비교적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지만, 부인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실제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짐은 물론이다. 워라밸을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이 저출산 대책과 연계되어 쏟아져 나왔음을 고려할 때, 그동안 천문학적 예산을 투여했음에도 출산율이 제자리걸음이었던 이유가 궁금했는데, 수수께끼의 한 자락이 풀리는 기분이다. 워라밸을 둘러싼 부부의 동상이몽을 말끔히 해소하지 않고서는 출산율 반등은 아무래도 헛된 꿈에 머물 것 같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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