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의 '몫'] 일자리 보장제와 돌봄제공자

한겨레 2021. 12. 12. 18: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아픈 가족을 돌보거나 돌보았던 이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꼭 한번씩 이렇게 묻게 된다.

인지 저하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할머니를 과거에 나눴던 이야기를 단서로 이해하게 됐다거나, 서로 존중할 수 있는 돌봄 관계를 위해 적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게 됐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는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기현의 ‘몫’]

조기현 | 작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아픈 가족을 돌보거나 돌보았던 이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꼭 한번씩 이렇게 묻게 된다. 돌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듣다 보면 꼭 그 여정에서 길어 올린 그만의 성찰과 언어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지 저하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할머니를 과거에 나눴던 이야기를 단서로 이해하게 됐다거나, 서로 존중할 수 있는 돌봄 관계를 위해 적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게 됐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는다.

분명 돌봄을 겪으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도움이 될 정보조차 몰랐으며, 함께 협력할 사람도 없었다던 이들이었다. 스스로 좌충우돌하며 몸으로 배운 지혜였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몸으로 겪을 걸 혼자 해석하느라 시간을 많이 쏟았던 것 같다. 그런 대화를 나눌 때면 돌봄 상황은 한 사람의 관계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일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역량을 지니고 있을 것 같다는 믿음도 생긴다. 누구나 돌봄 경험에서 자신만이 길어 올린 성찰과 언어를 공유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다양한 돌봄 위기를 겪는다. 간병 부담으로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소식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코로나19는 돌봄 없이는 이 세상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돌봄 공백을 메우는 사람들의 고통을 통해 드러낸다. 더 이상 돌봄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돌봄이 ‘서비스’이기 이전에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돌봄을 서비스로 대체할 수 없고,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돌봄도 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우리는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제안한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을 논의의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은 여성만이 돌봄 책임을 지는 사회를 해체하고자 한다. 누구나 돌봄을 하면서 산다면, 모든 일자리는 돌봄자이자 노동자인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질 듯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돌봄이 일을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일을 하느라 돌봄을 못하게 되는 상황도 사라질 수 있다.

문제는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로 그릴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 어떻게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느냐이다. 세상은 이미 많은 것들이 누구나 생계부양자라는 전제로만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일할 수 있도록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자는 이야기만 할 수 있는 걸까? 최근 파블리나 아르(R). 체르네바의 책 <일자리 보장>을 읽으며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책은 ‘일자리 보장제’라는 공공정책을 안내한다. 이는 일할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자는 구상이다. 일자리의 최종 고용자는 정부로 실업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저자는 일자리 보장제가 돌봄 제공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국가돌봄법’이라고도 강조한다. 보장되는 일이 환경, 지역, 사람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자리 보장제와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이 만나면 어떨까? 일자리 보장제에 참여하는 사람이 과업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돌봄을 주고받는 사람이라는 전제로 일자리를 설계하면 어떨까? 누군가를 잘 돌보면서 일하는 사람을 위한 조건을 기업이나 시장이 만들어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정부가 의지만 갖는다면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을 기반으로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을 듯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잘 돌보고 잘 일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런 사회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길어 올린 돌봄의 성찰과 언어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