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굿바이 대통령

김태규 2021. 12. 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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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1990년 1월22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한 뒤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태규ㅣ정치팀장

1990년 그날의 기억은 ‘추운 겨울날 집 앞 공터에 뽀얗게 일던 흙먼지’로 남아 있다. 집에 들어가 티브이를 켜니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등장했다.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다.

1992년 고등학교 에이치아르(HR)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대선 후보 지지 연설을 해보자고 하셨다. 3자 대결답게 발표자도 3명이었다. 나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강조하며 김대중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해 대선에 정주영이 나왔으니 ‘해볼 만하다’ 생각했는데 승자는 김영삼이었다. 그들이 괜히 손을 잡은 게 아니었다.

비주류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험난한 길을 걸었지만 ‘탄핵 역풍’ 덕에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152석을 얻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 계열의 총선 첫 과반 승리였지만 1년 뒤인 재보선에서 참패하며 과반 의석이 무너졌다.

2016년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더불어민주당이 새누리당에 승리했다. 정치부 기자로서 써야 할 뉴스거리가 넘쳐났다. 날을 넘겨 새벽 3시에 퇴근하며, ‘달이 차면 기우는구나’ 싶었다. 얼마 안 가 대통령까지 물러났다. 추운 겨울이 아닌 따뜻한 5월에 정권이 바뀌었다. 그리고 3년 뒤 총선에서 180석 슈퍼여당이 탄생했다.

87년 이후 대선과 총선이 교차되며 행정-입법권력의 조합이 이뤄졌지만 방향성은 일정했다. 한나라당 계열 대통령 4명은, 인위적 정계개편까지 감행하며 여대야소 정국에서 ‘편하게’ 권력을 행사했다. 반면 민주당 계열 대통령 3명은 항상 소수파로 출발했다. 1990년 1월22일 3당 합당이 시공한 ‘기울어진 운동장’의 위력이었다.

그렇기에 지난해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180석 압승은 일대 사변이었다. 신군부 세력의 달콤한 야합 제의를 뿌리치고 행정-입법권력을 동시에 장악하는 데 꼬박 30년이 걸렸다. 전대미문의 권력을 획득한 ‘다수파’ 문재인 정부가 어떤 성과를 낼지 궁금했다. 그러나 수많은 개혁과제들이 실현되지 못했던 게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었다는 ‘오래된 믿음’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이런저런 ‘탓’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집권세력의 오만과 무능만 도드라졌다.

‘제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한 만큼, 대통령만 바뀌면 세상이 바뀔 거라는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 중 임기 말에 이르러 ‘한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호의적 평가를 받았던 이가 있었던가. 5년 만에 한번씩 ‘철인’을 기대하며 대통령을 뽑아놓고 실망하고, 또 베팅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권력의 속성은 절제가 아닌 남용이다. 승자독식 방식으로 권력을 왕창 몰아주고 이를 현명하게 쓰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전지전능할 수 없는 ‘인간’에게 변치 않는 유능함만을 강요하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는 이제 성공할 수 없다는 게 역사적 실험으로 확인된 게 아닐까.

문재인 정부는 2018년 3월 ‘대통령 4년 연임제’를 포함한 개헌을 추진하면서, ‘국회의 총리 추천 또는 선출제’를 요구하는 야당의 요구에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대통령제는 국민의 뜻”(조국 당시 민정수석)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 지지율이 70%를 넘던 그때의 대통령제 선호가 지금도 여전할지 모르겠다. 최근엔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주는 조사 결과도 나온다. ‘리셋코리아 개헌분과’(위원장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올해 9월30일~10월6일, 전국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웹 여론조사에서 ‘선호하는 정부 형태’를 묻자 분권형 대통령제 응답이 53.2%로 가장 많았다. 의원내각제는 19.8%, 대통령 중심제는 14.7%였다. 권력을 ‘누구에게 몰아줄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배분해 쓸모있게 작동시킬 것인가’를 고민할 시점이 됐다. ‘역대급 비호감 대결’이라는 대통령 선거도 이번이 마지막이길.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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