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삶이 가벼워져요"

허호준 2021. 12. 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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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제주 선래왓 주지 인현 스님
제주 선흘리에 있는 수행처 선래왓에서 만난 인현 스님. 허호준 기자

“걸을 때는 먼 산을 보지 마세요. 지금까지 먼 곳을 보며 살아왔잖아요. 걸을 때는 발로 호흡하십시오. 그 발에 땅이 닿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 발이 느끼는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며 다가온 땅에 감사하십시오. 스스로를 사랑하십시오. 당신은 우주를 밟고 서 있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자리를 넘볼 수 없습니다. 땅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당신은 온전히 주인공입니다.” (‘지금 당신이 온전히 주인공입니다’ 중)

수행자의 나지막하면서도 평온을 찾게 하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제주의 중산간 선흘리에 자리 잡은 수행처 ‘선래왓’ 인현 스님이 최근 펴낸 산문집 <길은 언제나 내게로 향해 있다>(마음의숲)가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출판사 권유로 첫 수행 산문집 펴내
‘길은 언제나 내게로 향해 있다’
“힘든 이들에게 작은 위안 됐으면”

어릴 때 제주 사찰에서 자라다 출가
지난해 현대식 사찰 ‘선래왓’ 재개원
“착한 이여 잘 오셨다는 뜻이죠”

마음의숲 제공

세계자연유산 검은오름의 길목에 있는 선래왓은 기존의 전통사찰과는 다른 카페 같은 소박한 사찰이다. 건물 가운데 네모난 연못이 있는 현대식 구조의 선래왓에는 스님이 직접 재배하는 아담한 규모의 녹차밭이 있고, 주위에는 야트막한 숲 동산이 있다. ‘선래’(善來)는 ‘착한 이여 잘 오셨다’는 뜻이고, ‘왓’은 제주어로 ‘밭’ 또는 앙코르와트의 ‘와트’처럼 사원을 의미한다.

인현 스님은 “건축은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다. 사찰은 집이라는 공간에 인간의 생활을 수행과 기도로 채워 넣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며 “전통사찰은 그 의미를 잘 보존해야 하지만, 앞으로의 사찰은 시대와 문화의 변화도 반영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고민을 선래왓에 현대적으로 담았다”고 설명했다.

어린 시절 제주 어촌 김녕의 백련사에서 출가한 인현 스님은 해인총림 해인사 승가대학과 남원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경전을 공부하고 쌍계사와 범어사, 미얀마 마하시 명상센터 등에서 수행하는 등 오랫동안 걸망을 짊어지고 구도의 삶을 찾아다녔다. 선래왓에 정착한 뒤에는 오름과 바다, 숲길을 다니며 성찰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눈이 내린 선래왓 녹차밭과 숲동산. 인현 스님 제공

“출판사 쪽에서 지인의 소개로 여기저기 실린 내 글을 보고, 요즘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글이 좋다며 출간을 권유했어요. 부끄럽지만 조금이라도 힘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책을 내게 됐어요.”

산문집에는 자연 속에서 성찰하고 위안을 얻는 수행자의 경건한 구도의 모습이 보인다. 산문집의 화두는 ‘길’이다. “진정한 쉼은 길 위에 있다”는 인현 스님은 “길은 누구를 만나기 위해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 그곳에서 성찰이 이루어진다. 성찰이란 고독의 불빛이다”고 이야기한다. 신새벽 별에서, 오름 위의 바람에서, 선래왓에 내리는 눈에서, 곶자왈 숲 속에서, 사계절 꽃이 피고 지는 속에서 인현 스님은 길을 만나고, 그 안에서 성찰하고, 쉼터를 발견한다.

“‘길 위에 선다’는 것은 생각과 언어와 행위를 챙기는 수행이다. 수행이란 ‘내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라는 인현 스님은 삶에 지쳤을 때 숲길을 걸어보라고 권유한다. 싱그런 풀 내음을 맡으며 숲의 삶을 들여다보면 고난 속에 평안을 만나고, 그곳에도 누군가는 생을 의탁하고 행복을 꿈꾸고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지난해 겨울 제주 선래왓 건물 안 연못에 날아들어온 왜가리. 인현 스님 제공

인현 스님은 마음 길을 걷는 여행자는 누가 기억해주지 않아도 햇살 한 줌에 의연할 수 있으며, 누가 손잡아 주지 않아도 비 한줄기에 평화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삶 자체가 모두 땅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이며 “지금 겪는 고통마저도 햇살과 정성을 모아 쌓은 돌담처럼 그 자체로 삶을 풍요롭고 넉넉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들녘을 걸으며 발이 딛고 있는 대지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좀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면 안 되겠습니까. 2등, 3등으로, 아니 꼴등으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앞서가는 이가 기준이 되지 않고 한 걸음 뒤처져 가는 이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의 비용이 훨씬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만나는 이마다 반갑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무엇을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중)

숲 속에서 칡나무와 등나무의 넝쿨들이 새 숲을 향한 강한 열정으로 서로 다투며 올라가는 모습에서 인현 스님은 “갈등은 삶의 불꽃이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 다양하게 가꿔지는 숲에서 건강하게 갈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제주불교사도 그의 관심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생활했지만 정식 출가를 하면서 불교가 제주사회에 어떻게 스며들었고,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20여년 전 제주불교사연구회를 만들어 불교 관련 제주 근현대사 자료와 증언을 모았다”며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앞으로 고대와 중세사에 대해 정리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인현 스님은 코로나19로 지친 이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코로나19로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습니다. 지금 당장 삶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의 힘겨움이 누군가에는 삶을 헤쳐나가는 지혜가 되고 밝은 웃음을 짓게 하는 위안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삶의 무게는 가벼워집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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