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밀 담은 '추정 어람관안' 헌종 때 제작, 고종 때까지 사용"

김종목 기자 2021. 12. 1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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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관안 내(官案 內)>와 <관안 외(官案 外)>로 이뤄진 ‘어람관안(御覽官案)’(추정·경향신문 12월1일자 1·14면 보도) 제작 시기가 이르면 1843년(헌종 9년)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1871년(고종)까지 사용했다는 분석도 아울러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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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은 지난 11일 열린 한국고문서학회 제236회 연구발표회에서 <관안 내> <관안 외> 두 권의 서체를 분석한 뒤 이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손 소장은 “제24대 임금 헌종(1827~1849)과 효현왕후 김씨(1828~1843), 계비 효정왕후 홍씨(1831~1903)를 모신 능인 경릉(景陵)의 능호는 효현왕후 김씨 사망 때인 1843년 제정한다. 이 경릉이란 글씨가 <관안 내>에 나오는데, 제작 시기를 빨리 잡으면 능호 제정 때인 1843년 추정이 가능하다”고 했다.

손 소장은 이날 <관안 내>와 <관안 외>의 사용 시기를 두고 “적어도 묘(墓)를 원(園)으로 고친 이듬해인 1871년(고종 8년)까지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인조(재위 1623~1649)의 맏아들인 소현세자(1612~1645)의 소경원(昭慶園)을 들었다. 손 소장은 “‘소경원’은 원래 이전까지 ‘소현묘’로 불렸다. <관안 내> 편의 ‘소경원’은 1870년 고종 때 묘에서 원으로 추존하면서 고쳐 쓴 글씨”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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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안 내(官案 內)> 서체 변화로 제작·사용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영회원(永懷園, 왼쪽에서 세번째)과 경릉(景陵, 오른쪽에서 세번째) 서체 차이는 뚜렷하다. 영회원은 새로 써 덧붙였다. 1870년 묘를 원으로 격상했다. 손환일 소장 제공

소현세자 비 민회빈의 무덤인 ‘영회원(永懷園)’도 민회묘(愍懷墓)라 불렸다. 손 소장의 분석 자료를 보면, ‘영회원’ 글씨는 흰 종이에 쓰여 원래 종이에 덧붙여져 있다. ‘경릉’의 서체와 명확하게 대비된다. 손 소장은 “영회원도 1870년 새로 쓴 글씨”라고 했다.

이날 발표회에선 ‘어람관안’인지를 두고도 토론이 이뤄졌다. 나영훈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은 “수록 내용 정보들은 새롭다기보단 굉장히 편의적으로,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고 했다. 이어 “(<관안 내>와 <관안 외> 표지는 오동나무인데) ‘어람관안’ 표지는 중국산 비단으로 만들라는 명이 남아 있다. ‘임금께서 어람하신다’는 뜻의 ‘상어람(上御覽)’이라 쓰게 돼 있다. (지금까지 나온) 어람관안은 (모든 관서를 취합한 것이기보다) ‘어영청 관안’처럼 관서별로 정리한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그렇다고 어람용이 아니라고 확정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도 했다.

안승준 한국고문서학회 회장은 “경화 양반으로서 대대로 관직을 역임한 집안에서 만들었을 수 있다. 관료제 기록 차원에서 정리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안 회장은 <관안 내> <관안 외>를 두고 “지금까지 나온 관행적인 내용(인사명부)의 관안과는 (수준, 차원이) 다르다. 법전, 지도류 등등을 종합한, ‘조선학 개론’의 요약판”이라고도 했다.

손 소장은 “국경 현황과 병선, 군사 현황 등 방대한 국가 1급 자료까지 들어간 이 관안을 임금 아니면 누가 보고, 사용하겠나. 기본 상식으로 봐야 한다. 제작 형태보다 내용을 보고 용도를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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