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리포트]파랑일까, 초록일까

박영경 기자 2021. 12. 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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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광선은 파장이 380~700㎚  (나노미터‧1㎚ 는 10억 분의 1m)인 빛이다. 이 파장 스펙트럼에서 사람의 눈은 수백만 가지의 다른 색을 인식한다. 하지만 언어에서 분류하는 색의 숫자는 훨씬 적다. 한 예로 볼리비아의 치마네족 대부분은 색 구분 시 흰색과 검정, 빨강을 나타내는 단어만 사용한다. 산업화된 나라는 대개 언어에 10~12가지 정도의 색을 분류하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 ‘진노랑’ ‘불그스름하다’ ‘푸르뎅뎅하다’와 같은 수많은 색채어가 떠오르겠지만 이는 파생 색채어로 기본 색분류에 포함되지 않는다.

2009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술지 ‘관악어문연구’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각기 다른 언어라도 색채어에는 공통적인 계층이 있다. 기본 색채어가 2개인 언어는 대개 검은색과 하얀 색을 표현한다. 3개인 언어는 여기에 빨간색이 추가되고, 4~5 개가 되면 노란색과 초록색이, 6개가 되면 파란색이 추가되는 식이다. 갈색과 분홍색, 보라색, 회색, 주황색은 그 다음 나타 난다.

여기서 과학자들은 색채어가 5개에서 6개로 늘어나는 단계인 ‘파란색’이 나타나는 지점에 관심이 있다. 초록색과 파랑을 한데 묶어 ‘푸른색’으로 통칭하는 언어권과, 둘을 엄격히 구분 하는 언어권 사이에 차이가 있을 거라 추측한다. 둘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권을 초록색(green)과 파란색(blue)의 합성어 ‘그루(grue)’ 언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많은 초록 곰돌이 속에 파란 곰돌이 한 마리가 감쪽같이(?) 숨었다.

왜 감쪽같냐고? 한국어는 ‘초록’과 ‘파랑’을 구분하지만,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한데 묶어 부르는 언어도 많아서다. 이런 언어에서는, 예를 들어 19마리의 곰돌이가 다 ‘푸르다’고 한다. 하늘과 초원이 똑같은 색으로 기록된다. 왜 ‘빨주노초파남보’ 중 유독 파랑과 초록 사이에서만 혼란이 일어난 걸까

○ 색맹 비율 따라 파란색의 존재 갈려

정상 색각이 보는 세상(왼쪽)과 적록색맹이 보는 세상(오른쪽). 적록색맹은 모든 색을 노랑 또는 파란 계열로 인지하므로 파란색의 구분이 중요하다. 그래서 적록색맹의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언어에 ‘파란색’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는 연구도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언어는 사람들이 의사소통하다가 나타난 작은 변화가 여러 세대에 걸쳐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새로운 단어가 나타나는 방식 으로 진화한다. 색채어의 종류가 다양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만큼 다양한 색채를 말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색 구분 능력이 그루 언어권과 비그루 언어권을 결정짓는 원인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하지만 곽영신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는 “색약이나 색맹을 제외하면 인종, 성별 등은 색 구분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인류는 보편적으로 색 구분 능력이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2017년 영국 서섹스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생후 4~6개월 아기 179명을 대상으로 색상을 구분하는 실험을 했다. 아기의 눈앞에서 동일한 색상 두 개를 스크린에 띄우다가 서로 다른 색상을 띄웠을 때의 반응을 토대로 두 색상을 구분 하는지 확인했다. 프랭클린 교수는 이 실험으로 아기들이 선천 적으로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다섯 가지 색상을 분류할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doi: 10.1073/pnas.1612881114

하지만 색맹이나 색약인 사람들은 예외다. 색 구분 능력이 정상 색각을 지닌 사람보다 떨어진다. 미국 오하이오대 연구 팀은 적록색맹과 그루 언어권과의 관계를 분석했다. doi: 10.1017/
s0952523804213098 적록색맹은 빨간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색이 노란 계열 또는 파란 계열의 색으로 보인다.

연구팀은 적도 근처의 국가에서는 적록색맹이 적고, 위도가 높아질수록 적록색맹이 많아진다는 데 주목했다. 분석 결과 적록색맹의 비율이 낮은 곳에서는 언어에 파란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 경향성이 나타났다. 반대로 적록색맹의 비율이 높으면 파란색이 언어에 존재했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적록색맹은 색을 구분하는 데 파란색이 중요하므로, 적록색 맹의 비율이 높은 곳일수록 언어에 ‘파란색’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 빛이 센 지역에선 파란색 구분 드물어

언어는 사람이 사는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단 데듀 프랑스 파리리옹대 교수팀은 총 142개 인구 집단의 언어와 환경을 조사했다. doi: 10.1038/s41598-021-98550-3 중앙아메리카나 동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에서는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드물었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280~315nm 파장대의 자외선(UV-B) 노출량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UV-B의 노출량이 적은 고위도 지역 에서는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흔했다. 근처에 큰 호수가 있는 경우에도 파란색 단어가 존재했다.  

연구팀은 자외선에 많이 노출되면 수정체의 갈색화가 일어 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수정체 갈색화는 원래 노화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황색 필터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셉 하디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의대 교수는 수정체의 갈색화가 파란색 구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doi: 10.1167/4.8.56 10명의 젊은 피험자(18~35세)와 10명의 고령 피험자(65~85세)를 대상으로 40개의 색을 언어로 표현하게 했다. 두 그룹 모두 비슷한 비율로 ‘파란색’을 답했다.

그리고 다음 실험에서는 젊은 피험자에게 고령 피험자의 수정 체를 모방한 렌즈를 씌운 뒤 같은 색상을 보게 했다. 그 결과첫 번째 실험과 같은 색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란색’이라고 답하는 비율이 현저히 줄었다. 고령 피험자는 서서히 노화 과정을 겪으며 노랗게 변한 파란색에 적응했지만, 젊은 피험자는 원래 보던 파랑과 비교해 덜 파랗다고 느낀 것이다. 2004년 워너 교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UV-B 노출이 높은 열대 지역에서 파란색이란 단어가 부족한 이유도 수정체의 갈색화와 관련돼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총 142개 언어에서 ‘파란색’의 존재를 확인한 결과다. 280~315nm 파장대 자외선의 노출량이 높고 적록색맹의 비율이 낮은 적도 부근의 언어권은 파란색이 나타나지 않는 경향성이 있다. 사이언티픽 리포트 제공

○색 구분은 원래 따뜻한 계열에서 뚜렷해

색은 크게 빨강, 주황, 노랑 등의 따뜻한 색과 초록, 파랑과 같은 차가운 색으로 나뉜다. 2017년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뇌인지과학부 연구팀은 본래 차가운 색보다 따뜻한 색 구분이더 명확하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doi: 10.1073/pnas.1619666114

연구팀은 언어에 세 가지 색상어가 전부인 치마네족 58명과 80가지 색을 구분해 라벨링하는 작업을 했다. 40명은 공통적 으로 따뜻한 색을 차가운 색보다 더 많은 색으로 구분하는 경향을 보였다. 비유하자면 따뜻한 색은 ‘빨강’ ‘노랑’ ‘주황’ 등으로 세세히 이름을 붙인 반면, 차가운 색에서는 ‘초록’으로 여러 색을 뭉뚱그려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다른 100개의 언어를 분석한 결과도 치마네족의 실험 결과와 비슷하게 따뜻한 색을 표현한 말이 차가운 색보다 많았다.

연구팀은 그 이유를 다양한 배경과 피사체가 담긴 2만 장의 사진을 분석해 찾아냈다. 따뜻한 색은 주로 피사체에, 차가운 색은 주로 배경에 쓰였다. 연구를 이끈 에드워드 깁슨 MIT 뇌인지과학부 교수는 “따뜻한 색이 물체에 많이 쓰이기 때문에 실제 사람과의 대화에서 따뜻한 색을 언급할 상황이 많은 것” 이라며 “초원이나 하늘 등은 주요 대화 주제는 아니기 때문에 초록과 파랑 같은 차가운 색이 언어에 다양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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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12월호 [이지 사이언스] 내 이름은 파랑? 초록?

[박영경 기자 longfestiv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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