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들의 낭만… ‘차박’에 빠지다 [S 스토리]

배소영 2021. 12. 1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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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다 키웠으니… 우울증 이겨내려… 노부부의 캠생캠사
시작 이유 가지각색
“평생 일, 행복한 노후 보내고파”
70대 부부 매주 금요일 오지여행
불멍·야외식사 즐기며 자연 만끽
제주 한달살이까지한 60대 부부는
유튜브도 운영 “사이 좋아졌어요”
왜 차박인가
텐트 칠 필요 없어 노년층에 인기
초기 구입비 제외하면 경제적인 편
욕심 안내고 자가용만으로도 가능
“바퀴 달린 별장을 끌고 소풍을 다니는 즐거움에 살고 있어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

대구 달서구에 사는 김재용(71)씨는 요즘 캠핑에 푹 빠졌다. 매주 금요일이면 아내와 함께 산골 오지로 떠난다. 그럴싸하게 캠핑카처럼 꾸민 승합차를 몰고 다닌다.

이들 부부의 금요일은 소풍을 떠나는 초등학생처럼 설렌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뒤 분식집에서 김밥 3줄을 사고는 승합차에 시동을 건다. “그냥저냥 시간을 때우며 사는 것보다 이렇게 캠핑을 다니면서 맑은 공기도 마시고 제철 음식도 먹고 사는 게 좋지. 요즘 유일한 낙이야.” 삼남매를 키우느라 손에 일만 달고 살아온 이들 부부는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캠핑을 택했다. 김씨가 개조한 승합차는 세간살이를 그대로 축소해 가져놓은 듯했다. 침대, 밥솥, 싱크대, 전기난로, 미니 냉장고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이번주 부부의 차박 캠핑지는 경북 울진군 염전해변캠핑장이다. 김씨가 바닷가를 병풍 삼아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펴는 동안 아내는 보온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내왔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손때가 묻은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같은 가수의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캠핑의 꽃’은 바로 ‘불멍’이라고 했다. 해가 저물자 이들 부부는 화롯불에 준비해 온 닭갈비를 구워 먹었다. 랜턴 불빛을 벗 삼아 반주까지 즐겼다. “차박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잖아. 가끔은 목적지 없이 무작정 발길이 닿는 데로 떠나기도 하는데,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캠핑을 즐기고 싶어”라고 말하는 김씨의 눈이 반짝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노년층의 여행 풍속도를 바꿔 놓고 있다. 남들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데다 산과 강, 바다 등 탁 트인 야외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캠핑이 인기다. 캠핑은 더는 젊은층의 점유물이 아니다. 호텔과 펜션 등 숙박시설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데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돼 차박 캠핑으로 눈을 돌리는 노년층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호화 호텔 부럽지 않아” 숙박비 ‘0원’ 차박 캠핑

캠핑을 즐기는 인구는 증가세다. 10일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까지만 해도 60만명에 그쳤던 캠핑 인구는 2019년 600만명, 지난해엔 700만명을 넘어섰다. 10년 새 11배가량 성장한 셈이다.

대부분의 노년층은 취미생활에 큰 돈을 들이지 않는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해도 본인에게 투자하는 돈을 아까워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차박 캠핑은 초기 비용만 들이면 돼 경제적 부담이 작아 노년층에게 각광받고 있다.

7년째 차박을 즐기고 있다는 배종만(68)씨. 그는 차박의 가장 큰 장점으로 경제성을 꼽았다. 집에서 식자재를 준비해오면 유류비와 고속도로 통행료를 제외하곤 나갈 돈이 없기 때문이다. 유료 캠핑장을 이용해도 1만∼2만5000원이면 충분하다. 배씨는 “차박은 초기 장비 구입비를 제외하곤 드는 돈이 많지 않아 부담이 작다”며 “가진 장비 중에서 가장 비싼 게 20만원짜리 간이 매트리스다”고 소개했다. “캠핑을 하면 돈을 주고도 못 살 멋진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어 호화호텔이 부럽지 않다”면서 “늙어서 가장 잘한 게 바로 캠핑”이라고 말했다.

4년째 전국을 돌며 캠핑을 즐기는 정장숙씨 부부.
정장숙씨 제공
◆텐트 치고 짐 풀지 않아도 돼… 노년층에 제격

차박은 번거롭게 텐트를 치고 접을 일이 없다. 주차만 되면 어디든 정박할 수 있다. 때문에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서 캠핑을 즐길 수 있어 노년층에게 제격이다.

정장숙(65·여)씨 부부는 4년 전부터 캠핑카를 끌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고 있다. 귀촌 대신 언제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캠핑카를 샀다.

이들 부부는 제주도 한 달 살기까지 성공한 프로 캠퍼다. ‘중년부부의 무작정 캠핑’이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정씨는 ‘캠핑카의 가장 큰 매력이 뭐냐’는 질문에 “계절과 관계없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집이기 때문에 큰 힘이 들지 않는다”고 답했다. “집보다 캠핑카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긴 한 주가 많다”면서 “캠핑을 다니면서 남편과 속 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고 자랑했다.

예천군 회룡포에서 만난 이창재(76)씨 역시 요즘 차박에 푹 빠졌다고 했다. 6년 전 아내와 사별한 이씨는 한때 노년 우울증을 겪었다. 3년 전엔 대장암 2기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받았다.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씨는 여가생활로 캠핑을 택했다. 중고 SUV(스포츠유틸리티차)를 구입해 캠핑카로 꾸몄다. 그 뒤부턴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체력적 부담 없이 운전만 해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게 캠핑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수풀이 우거진 산림이 안방이 된다”고 장점을 열거했다. 그는 “가족들이 번거롭고 불편하리라 생각해 초반엔 캠핑을 내키지 않아 했지만 이제는 나보다 더 재미를 붙여 새로운 여행지를 가자고 졸라대곤 한다”고 말했다.

◆차량 개조 가능해 진입 장벽 낮아… 별장처럼 캠핑카 구매도

노년층의 캠핑 진입 문턱이 낮아진 건 정부의 관련법 개정이 한몫했다. 정부는 지난 2004년 11인승 이상 승합차를 캠핑카로 개조하는 것을 합법화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승합차가 아닌 화물차·특수차도 캠핑카로 바꿀 수 있도록 자동차관리법을 개정했다. 다시 말해 값비싼 캠핑카를 구매하지 않더라도 기존 차량을 캠핑카처럼 꾸밀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노년층의 캠핑카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며 “자동차관리법 개정으로 어떤 종류의 차량도 캠핑카로 개조할 수 있는 데다 캠핑카를 빌릴 수 있어 노년층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통계를 보면 2019년 말 기준 캠핑카 등록 대수는 2만5000여대로 2014년 4000여대에 비해 6.25배 증가했다. 연간 4000여대씩 늘어난 셈이다. 캠핑아웃도어진흥원에 따르면 캠핑카 시장 규모는 2016년 1조5000억원에서 지난해 4조원대로 2.6배 성장했다.

별장 삼아 캠핑카를 구매하는 노년층도 많다. 업계 관계자는 “실제로 값비싼 고급 캠핑카를 사는 큰손은 주로 노년층”이라며 “은퇴 후 자연과 함께하는 여가생활을 즐기려고 캠핑카를 구매하는 ‘실버 캠린이(캠핑+어린이)’의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캠핑카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주행과 캠핑 기능을 모두 갖춰 스스로 이동 가능한 ‘모터 캐러밴’과 차량 뒤에 붙여 견인하는 ‘트레일러 캐러밴’이다. 노년층에게는 트레일러 캐러밴이 인기를 끌고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캠핑을 위한 별도 차량을 구매할 필요 없이 자가용만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무게 750㎏ 이하의 미니 캐러밴은 트레일러 면허가 따로 없어도 운전할 수 있어 노년층이 운전하기에 수월하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최근 캠핑장을 둘러보면 젊은층뿐만 아니라 노년층 비율이 상당히 늘었다. 문경시에서 3년째 캠핑장을 운영 중인 한 업주는 “최근 캠핑장을 찾는 손님을 보면 10개팀 중 3개팀가량은 노년층”이라면서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노년층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는 등 캠핑 트랜드가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 칠곡군 칠곡보오토캠핑장을 찾은 가족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칠곡군 제공
◆“사람 많은 캠핑장 택하고 찬바람 조심하세요”… 겨울철 안전사고 예방수칙

캠핑을 즐기는 노년층은 늘고 있지만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각종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화재와 일산화탄소 중독, 부탄가스 폭발 등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난달 20일 합천댐 주변 주차장 캠핑카에서 잠을 자던 A씨(68)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 부부는 전날 일행과 함께 승합차를 개조한 캠핑카 4대에 나눠 타고 대구에서 합천으로 이동해 차박을 했다. 부부는 밤이 되자 추위를 피하려고 액화석유가스(LPG) 보일러를 켠 상태로 캠핑카에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튿날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이들 부부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캠핑 사고는 특히 가을·겨울철에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삼는 열 도구는 산소 결핍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 사용에 유의해야 한다. 무색·무취의 일산화탄소를 포함한 배기가스가 조금만 차 안으로 유입되면 인체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특히 난방기에서 뿜어 나오는 일산화탄소는 15분 안에 사망에 이르게 해 치명적이다.

난방기기 사용 부주의에 따른 화재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캠핑객 상당수는 전기 난로·장판을 사용할 때 용량에 맞지 않는 전선을 사용한다. 이럴 때 난방기기를 장시간 사용하면 전선 과열에 따른 불이 날 수 있다.

경북소방본부 관계자는 “노년층은 캠핑용 난방기구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일산화탄소 중독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텐트 환기구를 반드시 확보하고 차나 텐트 내부에서 숯을 이용한 화로대 등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요즘 같은 추운 날씨는 노년층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겨울철 심혈관질환과 빙판길 낙상, 골절 등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은동엽 소화기내과 전문의는 “캠핑을 즐기는 노년층은 위급상황 발생 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사람 이동이 잦은 캠핑장을 선택하는 게 좋다”면서 “차가운 공기로부터 폐를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나 머플러로 감싸 체온을 유지하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안동·대구=배소영·김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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