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클래식 음악 모르면 '세기의 쌍놈'이라고?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1. 12. 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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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채만식 '피아노는 졸립고, 교향곡은 시끄럽기만'..'음악 알아듣는 묘방 있으면 전수해달라' 간청
도쿄 유학생 출신 모던 보이 채만식은 1940년 신문에 '피아노는 졸립고, 교향악은 시끄럽기만 하다'며 자신을 '갈 데없는 세기의 쌍놈'이라고 썼다. 서양 클래식 음악은 당시 지식인이 갖춰야하는 필수 교양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주는 제 아무리 명곡이라는 것을 들어도 졸립고, 바이올린은 차라리 덜한 편이되 교향악에 이르러서는 겨우 시끄러운 줄이나 알지 ‘베토벤’인지 ‘짜스’(재즈)인지 그 분간조차 못할 지경이다.’

도쿄 유학생 출신 ‘모던 보이’ 채만식에게도 서양 고전음악은 멀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서른 여덟 채만식은 ‘難物인 음악’(매일신보 1940년 3월14일)이란 글을 신문에 썼다. ‘탁류’ ‘태평천하’ ‘레디메이드인생’같은 대표작을 신문·잡지에 발표한 채만식은 이미 유명작가였다.

채만식은 ‘갈데 없는 ‘세기(世紀)의 쌍놈’'이라 자학하며 ‘아무리 해도 음악이란 내게는 난물중에 유수한 난물에 속하는 者이다. 누구 썩 손쉽게 그 놈 음악을 알아듣는 묘방이 있거들랑 좀 전수를 시켜주셨으면 싶다’고 썼다.

채만식이 ‘쌍놈’운운하는 자학적 표현까지 써가며 서양 클래식 음악을 거론한 이유는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하는 필수 교양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때문이었다. 음악학자 이경분씨는 ‘서양 음악에 대해서는 선망과 동경에 빠져있으면서 현대 인텔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 덕목으로, 즉 메인스트림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좋으나 싫으나 알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으로 숭배했던 것같다’( ‘일본 식민지 시기 서양음악의 수용과 그 정치적 의미’)고 당시 분위기를 소개했다.

바이올린을 든 모던 보이가 어느 초가집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면서 구애하고 있다. 안석주가 조선일보 1928년 4월6일자에 실은 만문만화 '로미오와 줄리엣'

◇중학생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 끼고 다녀

구한말 교회나 성당, 미션 스쿨을 통해 도입된 서양음악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 신식 유행처럼 번졌다. 1927년 한 대중월간지는 서양 음악의 광적 유행을 이렇게 썼다. ‘요새는 소위 남녀중학생아이들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끼고 다니고 부자 연인(戀人)을 졸라서 제집에다 피아노를 사놓고 무엇이 무엇인지 멋도 모르며 뚱당거리고 앉았는 모양이란….’(‘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2권3호, 1927년3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핫템’으로 떠오르자 다룰 줄도 모르면서 값비싼 악기를 사들이는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늘었다. 1922년 현진건 소설 ‘피아노’에도 일본 유학생 출신 모던 보이가 신여성과 재혼하면서 둘 다 칠 줄도 모르는 피아노를 구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서양 클래식 음악은 고급스러운 신식 문화이자 근대인이 갖춰야할 교양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로 프로포즈하는 모던 보이

작가 안석주는 1928년 봄 세태를 풍자한 만문(漫文)만화를 신문에 냈다. 양복 차림 청년이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문 아래 서서 바이올린을 들고 세레나데를 연주하다 여인의 손등에 입맞추는 그림이었다.

‘이러한 봄에는 사나이는 ‘로메오’, 계집은 ‘쭐렛’ㅡ그리하야 선천(先天)에도 없고 후천(後天)에도 없는 대희곡가(大戱曲家)의 연극이 방방곡곡에 연출되는 것이다. ‘룸펜 바이올리니스트’ 한 분이 어느 다ㅡ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밑에서 어제밤 달뜰때부터 오늘 해뜰때까지 바이올린을 긁고 있었으니 그의 서툰 바이올린도 처음부터 끝까지 세레나데를 가늘게 또한 굵게 긁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야흐로 뭇집의 대문 여는 소리가 요란할 때 홀연히 그 창문이 열리며 노리끼한 손이 나오니 이 사나이는 불시에 눈물을 흘리며 그 손을 고이 고이 잡고서 손등에 키쓰를 하는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조선일보 1928년4월6일)

바이올린 연주 정도는 바쳐야 근사한 프로포즈라고 생각할 만큼, 서양 음악의 위력은 대단했다.

◇100년전 야나기 가네코의 YMCA 리사이틀

1920년대 경성에는 교회나 학교는 물론 종로 YMCA강당이나 경성 공회당에서 음악회가 자주 열렸다. 1920년 5월4일 종로 YMCA에서 열린 야나기 가네코(柳兼子) 리사이틀은 조선의 본격적인 첫 서양음악 연주회로 알려져있다. 가네코는 민예연구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내로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를 나와 훗날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다. 가네코는 이날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으로 프로그램을 채웠다. 토마 ‘미뇽’중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마이어베어 ‘예언자’ 중 ‘아, 내 아이여’, 베버 ‘마탄의 사수’ 베르디 ‘일 트로바트레’의 아리아와 슈베르트 가곡 등을 불렀다. 마지막은 비제 ‘카르멘’중 ‘하바네라’였다.

야나기 가네코 리사이틀이 얼마나 인상깊었는지 ‘청춘예찬’으로 이름난 작가 민태원(1894~1935)은 이 연주회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까지 썼다. 1921년 ‘폐허’에 발표한 ‘음악회’다. 소설 등장인물 심숙정과 하경자는 가네코 연주회에 다녀온 후 음악회 풍경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심(숙정) “애 참 왜 그리들 떠드는지 좀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더구면.”

하(경자) “아직 정도들이 유치하고 음악의 취미를 모르니까 그렇지.”

1920년 완공된 경성 소공동의 경성공회당. 1923년의 크라이슬러와 하이페츠 연주, 1924년의 짐발리스트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다. /조선일보 DB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 1923년 일본 연주에 이어 경성에 들러 리사이틀을 가졌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으로 유명하다. /public domain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1901~1987)의 1920년 모습. 그는 1923년 경성에 들러 리사이틀을 가졌다./Public Domain
1924년 11월 내한 연주를 가진 러시아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에프렘 짐발리스트(1889~1985). 서른 전후의 모습이다. 홍난파는 짐발리스트를 세계제1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치켜세웠다. /Public Domain

◇경성 공회당의 크라이슬러, 하이페츠, 짐발리스트

1920년대 경성에는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이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23년 한해에만 크라이슬러와 하이페츠가 다녀갔고 이듬해엔 짐발리스트가 내한했다. 공연장은 소공동(당시 長谷川町) 경성공회당이었다. 1920년 완공된 경성상공회의소 건물 2층에 자리잡은 경성공회당은 리사이틀을 열기에 적격이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작곡자로도 이름난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는 1923년 5월23일 내한공연을 가졌고, 훗날 바이올린의 신(神)이란 별명까지 얻은 스물 둘 신예 야사 하이페츠(1901~1987)는 11월5일 경성 청중을 만났다. 하지만 크라이슬러, 하이페츠 독주회는 일본인이 주독자인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일본어신문)가 주관한 탓에 조선인 사회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홍난파는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손바닥만한 경성 시중에 과연 이러한 대예술가의 예술에 접근하고 이러한 대음악가의 연주에 심취된 백의(白衣)의 인(人)이 누구누구이런가. 물론 주최자가 우리가 아니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선전을 하지 않았으니까 알지못하고 있었던 것이겠지만….’(‘세계적 제금가 악성 짐발리스트의 來京을 기하야,’조선일보 1924년11월24일)

홍난파는 1924년 11월26일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짐발리스트 경성 공연에 대한 기대와 의의를 담은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조선일보 1924년11월24일자

◇홍난파가 극찬한 짐발리스트

1924년 11월27일 열린 짐발리스트(1889~1985) 음악회는 경성음악동호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보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홍난파는 위 기고에서 ‘서악(西樂)이 동점(東漸)한 이래 수삼십년에 가극다운 가극 한번을 구경하지 못하고 관현악 다운 관현악 한번을 들어보지 못하고 지내왔으니…'라고 안타까움을 호소한 뒤 짐발리스트를 소개했다. ‘짐(짐발리스트)씨로 말하면 기교가 ‘크(라이슬러)’씨에 불하(不下)하며 노련한 악상이 역시 제타악가보다 우월한 외에 예술가로서의 침통하고 경건한 맛이 위선 청중을 괴화(魁化)케 한다. 다시 말하면 짐씨는 위대한 예술가인 동시에 위대한 인격자이다. 이점으로 보아서 나는 짐씨를 세계 제일위의 제금가라고 단언하고 싶다.’

연주는 대성황이었다. ‘그의 귀신 같은 ‘바요링’ 독주대회는…만장한 천여명 관중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때로는 청중을 취케하야 자못 선경(仙境)으로 이끄는 느낌이 있었다.’(‘작야의 樂聖 짐氏 독주회 성황으로 마쳐’, 조선일보 1924년11월28일)

1935년 부민관이 들어서면서 하얼빈교향악단 같은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전막 오페라(‘나비부인’) 내한공연까지 이뤄질 만큼 음악계는 활기를 띄었다. 하지만 고가(高價) 티켓은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일부 상류층 지식인과 상공업자, 총독부 고위관료와 일본 기업인 등으로 관객층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서구 클래식 음악은 여전히 대중에겐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참고자료

이경분, ‘일본 식민지 시기 서양 음악의 수용과 그 정치적 의미’, ‘음악학’ 18, 2010

조윤영, ‘경성의 음악회(1920~1935): 식민지 일상과 근대의 경험, 그 다양한 시각에 대하여’,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2018

‘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2권3호, 1927년3월

민태원, ‘음악회’, ‘폐허’제2호 1921년 1월

현진건, ‘피아노’, ‘개벽’제29호 1922년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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