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얼 선택 고민하느니 전장에서 폭탄 해체하련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2021. 12. 11.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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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허트로커'와 시리얼
영화 '허트 로커'에서 시리얼 선택을 놓고 고민에 빠진 주인공./서밋 엔터테인먼트

아아, 그랬었지. 아무 생각 없이 영화 ‘허트로커’(캐스린 비글로 감독)를 보다가 울컥했다. 작품·감독·각본상 등 아카데미 3개 부문을 석권한 허트로커는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 폭탄 처리반 이야기다.

2004년, 바그다드에서 사제 폭탄을 처리하던 중 반장인 상사 매슈 톰슨(가이 피어스)이 전사한다. 본국 송환이 40일 남짓 남은 가운데, 중사 빌 제임스(제러미 레너)가 새로운 반장으로 전입해 하사 샌본(앤서니 매키), 상병 엘드리지(브라이언 게러티)와 팀을 이룬다. 제임스 중사는 900점에 가까운 폭탄을 해체한 베테랑이지만 임무 처리 방식이 충동적이며 원칙을 어기는 경우가 많아 수하 반원들과 갈등을 겪는다.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서도 임무를 수행해 나가 송환이 단 이틀밖에 남지 않은 날, 처리반은 최악의 임무와 맞닥뜨린다. 자물쇠가 채워진 강철 폭탄 조끼를 강제로 착용당한 시민을 발견한 것이다. 제임스 중사는 볼트 커터까지 동원해 자물쇠를 자르려 애를 쓰지만, 타이머가 다 되어버려 결국 해체를 포기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이혼했으나 같이 사는 전처 및 아들과 일상에 복귀하려 애쓰지만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다. 전장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폭발음을 끼고 살다시피 한 그에게 일상의 고요함은 역설적으로 귀가 먹을 만큼 크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러던 어느날 제임스는 수퍼마켓에 아침 식사용 시리얼을 고르러 갔다가 압도당해 버리고 만다. 이토록 많은 시리얼이라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임무를 수행했던 그에게 길고 높은 벽을 이루고 있는 진열대의 시리얼이 한없이 하찮아 보인다. 고민 끝에 아무 거나 집어 들고 돌아서는 그의 등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 없다.

바로 이 장면에서 나는 울컥했다. 아아,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2009년 허트로커를 극장에서 보았다. 많고 많은 전쟁 영화 가운데 하나이겠거니 여기고 별생각 없이 보다가 수퍼마켓 진열대에 가득 들어찬 시리얼 장면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시 나는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무너진 경제 탓에 정리 해고돼, 8년간의 미국 생활을 급하게 정리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렇지, 시리얼 매대에 가면 저렇게 정신이 하나도 없지. 워낙 제품군도 많지만 결국은 같은 제품이 브랜드만 달리해서 판매되는 탓에 시리얼 매대는 미국의 쓸데없이 넘쳐나는 소비주의의 상징 같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틈만 나면 수퍼마켓에 들러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온갖 식료품을 집었다 내려 놓고 라벨을 읽곤 했다. 그런 경험이 결국 내가 건축을 그만두고 전업 음식평론가가 되는 데 상당 부분 일조했다. 같은 시리얼을 두고 제임스 중사는 염증을, 나는 향수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시리얼은 동기가 불순한 음식이다. 1890년대, 당시 유행했던 신경쇠약증(오늘날 기준으로는 근거 없는 진단과 병명)을 치료한답시고 의사인 존 하비 켈로그와 동생 윌 키스 켈로그가 처음 개발했다. 이름이 낯익다면 맞는다! 두 사람이 오늘날까지도 건재한 시리얼 브랜드 켈로그의 창업주다. 형제는 금욕적인 식생활을 권장했다. 음식으로 성정을 다스린달까? 이를 위해 직접 개발한 시리얼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판매되는 ‘콘 플레이크’이다.

시리얼은 건강식으로 출범했지만 탄수화물이라는 이유로 오늘날 천대받고 있다. 고작 시리얼을 고민하며 골라야 하는 일상에 염증을 느낀 제임스 중사는 자원해 바그다드로 복귀, 1년 동안 폭탄 처리 임무를 재개한다.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압도당할 만큼의 시리얼이 팔리지는 않으니, 먹겠다면 라벨을 꼼꼼히 읽고 당 함유량이 최대한 적은 제품을 고른다. 누른 귀리(오트)를 바탕으로 시리얼보다는 덜 가공된 제품인 무슬리나 그래놀라도 있으니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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