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倭와 싸우는게 상책" 明의 책략
총지휘관 송응창의 문서로 생생히 담아
"조선 민중에서 폐 끼치지 말라" 명했지만
실제론 약탈·겁탈 일삼으며 점령군 행세
일본군에 대패 후 '도요토미 봉공안' 추진
조선이 반대하자 "알아서 싸워라" 으름장
“… 지금 보고받기를, 왜선 수백 척이 이미 조선을 침범하여 형세가 심히 창궐합니다, 라고 하니 정황이 이미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성동격서는 왜노의 오랜 행태이므로 길을 나누어 중국으로 쳐들어오는 것도 반드시 없으리라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1592년 음력 6월, 일본군 대병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보고를 받고 명나라 병부는 대책을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상주했다. 즉, 조선의 왕 선조가 도와 달라고 요청한 것도 있지만, 내부 논의 결과 일본군을 막는 계책으로 명나라의 국경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조선에서 맞아 싸우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10월30일, 황제 신종은 칙서를 내려서 병부시랑 송응창(宋應昌·1536~1606)을 경략군문으로 삼고 조선 출병을 지시했다. 송응창은 항주 인화현 출신으로, 당시 나이는 57세. 송응창은 당시 지역 반란을 진압하면서 명성을 날리던 도독동지 이여송에게 명령을 내린다.
“조사해 보건대, 그대는 일찍이 선부진과 대동진 지방을 진수한 적이 있다. … 그대는 황제의 명지가 나온 뜻이 엄격했다는 점, 조선의 구원이 몹시 급박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신속히 요동으로 가서 함께 조치하도록 하라.”
송응창은 요동에서 이여송 등과 군사를 점검한 결과 명군은 당초 징병돼야 할 병사(7만명)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반면 일본군은 규모가 크고 강하기에 대적이 안 될 것으로 판단하고 추위를 신속하게 이용해 승리를 취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1월, 송응창은 이여송에게 제독군무로서 4만3000여명의 병사를 인솔해 조선으로 출병하도록 명령했다. 출병하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30개조의 군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 하나. 장사들이 조선 땅을 지나가면서 반드시 닭이나 개라도 놀라지 않게 하고, 추호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감히 멋대로 민간의 풀 하나, 나무 하나라도 움직이는 자는 목을 벤다.”
조선의 민중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한 송응창의 지엄한 군령을 이여송을 비롯해 명나라의 장령, 군관, 군병 등은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조선 민중들에게 명나라 군사는 일본군과의 전투에는 안중에 없고 갑질하는 점령군으로 기억됐다. 곳곳에서 약탈을 일삼는 명나라 병사들, 조선의 아녀자들을 겁탈하는 군관들,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명나라 장령들.
송응창은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의 명군이 일본군을 얕보다가 벽제관에서 대패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영파를 통해 조공하도록 하는 봉공안을 중심으로 일본과 강화 논의에 착수했다. 조선의 선조와 군신들이 반대하자 무모하다고 비판하며 복수하고 싶다면 혼자 싸우라고 하면서.
“왕께서 예전처럼 고집을 부리고 제 말을 옳다 여기지 않는다면, 저와 제독은 삼군을 호령하여 임진강의 서쪽을 지킬 테니, 왕국의 군신은 마음대로 그대의 병사에게 명령하고 그대의 사졸을 정돈하여 왜와 서로 싸우십시오. 저는 개성의 산봉우리에 올라 왕국의 군용을 멀리서 바라보겠습니다.”
송응창은 결국 봉공안 문제로 명나라 조정에서도 거센 비판을 받아 탄핵된다. 그는 신종에게 상주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해명했지만.
“전투를 계속해서 치르면서 깊이 들어가자 장사들은 피로해지고 고생은 지속되었으며, 양식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 축축해지니 활의 아교가 풀렸고, 진흙이 깊어져 무릎까지 빠지니 북쪽의 병마가 치달릴 수 없었습니다. … 왜노들이 평양성의 패배를 거울삼아 왕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왜노들은 이내 구슬을 잇듯이 진영을 펼치고 성의 중앙에는 성채를 세웠으며 넓게 높은 누각을 세우고 두루 구멍을 뚫어놓아 조총으로 구멍에서 발사하면 맞는 자 중에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왜노들이 결국 우리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다시금 두려워하면서 조공을 청해 왔습니다. 신이 즉시 이때를 이용해 저들에게 왕경에서 물러나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낸 것을 강요하니, 저들은 곧장 받아들였습니다.”
책 ‘명나라의 임진전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이듬해 말까지 경략으로서 명군을 총지휘한 송응창이 상주문, 공문, 명령서, 편지, 자문 등 당시의 핵심문서를 엮은 책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번역한 것으로, 임진왜란 초기 상황을 명나라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들려준다. 명나라가 참전하게 된 배경과 속내, 평양성과 벽제관 전투 전후의 명군 동태, 일본과 강화협상을 추진하는 명군의 입장과 그들의 속사정 등등.
국립진주박물관은 지난해 제1·2권(역주서)에 이어 이번에 제3·4권(역주서)과 제5권(교감·표점본)을 간행했다. 한국·일본 측의 사료를 중심으로 정립된 기존의 임진왜란 역사관에 더해 명나라의 시각이 반영된 연구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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