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230] 슬픔이 우리에게 묻는 것

백영옥 소설가 2021. 12. 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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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공부’의 저자 미리엄 그린스펀은 원인 불명의 뇌 질환으로 첫아이를 잃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둘째 아이는 근육이 굳어가는 병을 앓게 된다. 예고 없이 무너진 삶 앞에서 그녀가 알게 된 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거지?”라는 질문이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일, 아이가 완벽히 건강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총에 맞아 피 흘리는 아이 앞에서 이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이 총을 누가 쏜 것인지 알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걸까. 총알을 제거하고, 피 흘리는 아이를 치료하는 게 먼저다. 어떤 경우에도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부터 답을 찾아야 한다.

'감정 공부(Healing Through the Dark Emotiions·2004)'의 저자 미리엄 그린스펀. /미리엄그린스펀닷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연, 이혼, 해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주말 없이 야근을 거듭하고, 게임이나 쇼핑에 몰입하더라도 몸은 기억한다는 것이다. 분노나 중독으로 마비시킨 슬픔은 온몸을 돌아다니다가 언젠가 시한폭탄처럼 우리를 쓰러뜨린다. 문득 잠이 오지 않고, 공연히 눈물이 나고, 특정 부위에 통증이 온다. 돌보지 않은 슬픔이 우리 몸 안에서 ‘병’으로 피어나 묻는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 나를 봐달라고 말이다. 몸은 모두 다 기억한다.

불행히도 세상엔 ‘왜’가 없는 질문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어째서 우리에게 찾아올까. 나는 고통이 과거의 방식대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인’이라고 믿는다. 병이나 죽음이 내게 찾아온 건 더 이상 과거처럼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깨진 컵 안에 물을 채우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컵을 찾는 것이다. 깨진 유리를 치우는 일은 눈물 나게 힘들겠지만, 물컵이 다 채워졌을 때 즈음, 우리는 아마 과거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찻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느꼈던 그린스펀의 기쁨처럼 “어떤 것도 무심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순간순간이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는 방법을 알기 전까지, 우리 누구도 결코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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