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플랫폼노동자 '노동자'로 추정키로..한국은?

박태우 2021. 12. 1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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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위 '플랫폼 노동조건 개선 입법지침' 발표
전자적 감독, 보수 수준 결정 등 충족땐 '노동자'
한국 추진 '플랫폼종사자법' 견줘 권리 수준 높아
EU 기준 적용하면 배민·쿠팡이츠 모두 사용자
9일 벨기에 브뤼셀 유럽연합에서 발디스 돔브로스키 유럽연합 ‘사람을 위한 경제’ 위원회 부위원장(왼쪽)과 니콜라스 슈미트 ‘일자리와 사회적 권리’ 위원장이 ‘플랫폼노동에서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입법지침’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EPA/연합뉴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노무제공 플랫폼기업을 노동법의 ‘사용자’(고용주)로 추정하는 입법지침 초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노무제공 플랫폼에서 일감을 받아 소득을 얻는 플랫폼노동자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법의 ‘노동자’에 해당한다. 이 입법지침이 유럽의회를 통과하면, 회원국들은 2년 안에 이 지침에 따라 국내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 9일(현지시각) ‘플랫폼노동에서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입법지침’을 발표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보도자료를 보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이 지침을 통해 “플랫폼노동자가 노동권과 사회보장에 관한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법적 확실성을 증가시켜 노무제공 플랫폼이 단일 시장의 경제적 잠재력과 평등한 경쟁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5개 기준 중 2개 이상 충족땐 ‘사용자’

입법지침의 핵심적인 내용은 플랫폼기업의 ‘사용자성’ 판단기준, 즉 플랫폼노동자의 ‘노동자성’ 판단기준이다. 그동안 플랫폼노동자는 노동법의 ‘노동자’의 특징과 ‘자영업자’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데도 ‘자영업자’로 분류돼 노동권과 사회보장 관련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무제공 플랫폼 기업의 90% 이상이 플랫폼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분류하고 있다 한다.

입법지침은 플랫폼기업이 플랫폼노동자의 자유를 얼마나 통제하는지 평가할 수 있는 5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플랫폼 기업이 아래의 5가지 기준 가운데 2가지 이상을 충족한다면 ‘사용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플랫폼 기업의 사용자가 되면 이들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플랫폼노동자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자’로 재분류된다. 최저임금, 단체교섭권, 노동시간·보건에 관한 권리, 실업급여·산재보험·유급병가 등의 권리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

△플랫폼노동자의 보수의 수준 또는 상한선을 설정

△전자적 수단으로 플랫폼노동자의 업무수행 감독

△플랫폼노동자의 근무·휴직기간 선택의 자유, 업무를 수락하거나 거절할 자유, 업무를 제3자에게 위탁할 자유 제한

△플랫폼노동자의 외관(유니폼 착용 등)과 서비스 제공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 설정

△플랫폼노동자의 (독자적) 고객확보나 제3자(경쟁업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가능성 제한

플랫폼기업은 이러한 ‘고용상태 추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고용상태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플랫폼기업에 있다. 현재까지는 노무제공자가 소송을 통해 ‘노동자’임을 판단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노동자임을 입증해야 했다면, 이번 입법지침은 플랫폼기업에 그 책임을 넘긴 것이다.

플랫폼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에 대한 내용도 입법지침에 포함됐다. 플랫폼기업들은 업무의 할당, 수행한 업무에 대한 감독과 평가, 인센티브 제공과 제재 등에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다. 이 알고리즘은 플랫폼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결정하고 있음에도, 플랫폼 기업들은 이것이 ‘영업기밀’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입법지침은 이 알고리즘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플랫폼노동자에게 업무의 배분·보수 지급·인센티브 지급 등의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또 플랫폼노동자는 알고리즘에 따른 ‘자동화된 의사결정’에 대한 설명을 받고 이에 대해 ‘이의제기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된다. 이러한 권리는 ‘노동자’로 재분류된 플랫폼노동자 뿐만 아니라, ‘자영업자’인 플랫폼노동자에게도 적용된다.

‘공정한 경쟁’ 위해 필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입법지침이 플랫폼노동자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태도다. 플랫폼기업은 플랫폼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분류하면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사회화’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집행위원회는 “플랫폼기업이 플랫폼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분류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사회적 혜택을 지급하지 않아, ‘새로운 경제’가 ‘전통(brick and mortar) 기업’에 경쟁우위를 갖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플랫폼노동자의 ‘오분류’ 해결이 회원국의 재정과 사회보험기금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위장 자영업자가 노동자로 재분류 되면, 연간 16억~40억유로(2조1300억~5조3200억원)의 재정·기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 입법지침이 유럽의회와 이사회를 통과하면, 회원국들은 2년 안에 이 지침에 맞도록 국내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이미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주요 유럽연합 회원국 법원에서는 입법지침의 취지를 담은 판결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스페인에서는 입법지침에 담긴 내용을 대부분 포함한 ‘라이더법’을 지난 8월부터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법이 음식배달 플랫폼노동자에만 적용되는 것과 달리 입법지침은 모든 플랫폼노동자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번 입법지침 마련도 유럽의회가 지난 9월 ‘배달·운전종사자의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적 권리보장을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따른 것이다.

지난 11월10일 배달라이더들이 안전운임제 도입과 라이더보호법 제정을 촉구 거리행진에 참여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EU기준 따르면 배민 라이더도 ‘노동자’ 해당

유럽연합의 플랫폼노동자 보호를 위한 입법지침 마련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플랫폼노동자의 숫자와 노동자성 판단에 관한 논쟁이 늘어나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법지침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르면, 배민커넥트나 쿠팡이츠 등 한국의 음식배달이나 대리운전 플랫폼기업 대부분이 ‘사용자’에, 이에 노무를 제공하는 플랫폼노동자는 ‘노동자’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제정을 추진하는 ‘플랫폼 종사자 보호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에는 유럽연합 입법지침에 포함된 ‘노동자 추정’ 등의 내용은 빠져있는 상태다. 이를 지적하는 <한겨레>의 이전 보도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해외의 경우 배달·운전 플랫폼 종사자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 세계적 흐름을 일반화하여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플랫폼 종사자를 특정한 고용형태로 획일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개별 플랫폼 종사자의 일하는 형태 등에 따라 근로기준법 및 노동조합법 상 근로자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윤애림 노동자권리연구소(민주노총 법률원 부설) 연구위원은 “(정부가 추진하는) ‘플랫폼종사자법’은 근로자 오분류 문제에 대해 실질적 대책이 없고, 알고리즘을 통한 통제에 관한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내용은 립서비스 수준으로 실효성이 없다”며 “정부는 플랫폼노동 보호에 관한 국제사회의 흐름을 직시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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