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상이 부과한 역할극의 공모자들..임솔아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김지혜 기자 2021. 12. 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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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84쪽 | 1만4000원

임솔아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작가와 함께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변해왔다. 첫 소설집에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인물들을 그렸다면 두 번째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서는 주로 20대 중반에서 30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받네.” 아란이 전화를 받자, 문경이 뜻밖이라는 듯 말한다. 한때는 단짝이었던 두 사람, 통화에선 이제 “각자의 과거를 연기”하는 시답잖은 말들만 오간다. 10년 전 기숙학원에서 문경은 “보살피는 거”에서 재능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문경은 아란을 보살폈고, 더 많은 이를 보살피려 간호학과에 갔다. 정작 실습에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환자 대신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과잉 진료를 피하기 위해 환자를 죽게 내버려둔 의사들을 정당화하는 일을 맡았다. 그쯤부터 문경은 안부를 묻는 아란에게 자꾸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했다. 아란 역시 문경에게 다가가지 못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했다. 문경은 아란에게 ‘보살피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문경은 이미 그러지 못했다. 두 사람은 점차 멀어졌다.

제10회 문지문학상, 제35회 신동엽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소설과 시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온 임솔아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가 나왔다. 책은 모종의 역할극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환경과 제도,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과 기능을 수행하려 혹은 거부하려 애쓰는 이들 각자의 사정을 들여다본다. 사회적 역할 같은 건 그저 허상일 뿐이라고 꼬집는 손쉬운 결말은 없다. 결코 ‘아무것’이 될 수 없는 촘촘한 역할극 속에서 ‘역할’ 이상을 살아내려는 크고 작은 발버둥이 9편의 단편소설에 담겼다. 표제작에서 문경은 아란과 통화하며 그네를 타는 척한다. “벤치에 앉아 아란이 소리를 지르면 함께 질렀고, 아란이 웃으면 따라 웃었다.” 파탄 난 역할극 속에서 문경은 그렇게 오래도록 삐걱거렸다. 그리고 끝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아무도 안 보살펴. 나만 생각해.” ‘보살피는 사람’ 문경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아무것’은 과거에 얽혀 있던 두 친구에게 자유의 이름이 된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의 주인공 ‘나’는 웃지 않는 사람이다. ‘나’에게 웃음은 약자의 불행을 화살처럼 겨누는, 그렇게 피 흘리는 약자마저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폭력, 위선과 공모하는 것이다. 그 공모가 곧 ‘눈치’로 번역돼, 사회 상규 비슷한 지위를 누릴 때에도 ‘나’는 의지적으로 무표정을 선택했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로맨틱 코미디를 보지 않았고, 대학 MT도 가지 않았으며, 취직하는 대신 10년째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다. 웃음의 형식으로 되풀이되는 폭력의 역할극에 가해자로든 피해자로든 참여하지 않겠다는 결기였다. ‘성공’ 혹은 ‘부’ 같은 세속적 가치와 결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밝은 세계”였다.

‘나’의 바람은 그답게 소박했다. 자기만의 공간에 살고 싶었다. 기숙사에서 원룸텔, 원룸 월세에서 1.5룸 반전세로 공간을 조금씩 넓혀가던 ‘나’는 서울의 임대료 상승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방 빌라 주택을 매입한다. 어렵게 얻어낸 안락은 장마와 함께 시작된 누수로 깨져버린다. 락스물로 벽의 곰팡이를 지우고 또 지우던 ‘나’는 보험금을 과잉 청구해 외벽 공사를 하자는 입주민 대표의 말을 듣는다. “좋아요”라고 답하며 ‘나’는 웃었다. 집을 아무런 하자가 없는 모델하우스처럼 꾸며 팔아치웠다. “누군가를 낚았다는 기쁨”에 이번에도 히죽 웃었다. ‘센트럴 퍼스트힐 아파트’로 이사갔다. “청약 당첨자가 되기 위해 싱글 맘과 위장 결혼”을 하고 “임신한 후 낙태”하며 “파양할 아이를 입양”하는 폭력의 공모를 알았지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룰 방법이 없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다.

책에는 문경처럼 ‘역할’ 밖에서 살기 위해 결심하는 사람과, ‘나’처럼 ‘역할’ 속으로 미끄러져가는 사람 모두가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에게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만두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문학계 권력남용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가 문단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의 친구 혜리는 스웨덴에서 유학하며 인종차별을 당하면서도 한국인 커뮤니티에 소속되기를 거부한다. 사회가 준비한 역할 대신 자신만의 목소리를 고집하는 두 사람의 삶은 마치 “얼음의 언저리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지만 어렵사리 유쾌하다.

그런가 하면 ‘단영’ 속 효정은 비구니로서 자신에게 기대되는 ‘이상적인 여성성’을 이용해 주지로 있는 사찰 하은사를 새롭게 꾸민다. ‘온화한 미소’라는 여성성의 판타지 속에서, 하은사는 날로 번창하지만 정작 절을 찾아온 여성들의 사연은 지속적으로 무시된다. ‘역할’에 굴종한 삶이지만, 그것이 절을 살리고자 한 효정의 최선이었다. ‘초파리 기르기’의 50대 여성 원영 역시 협소한 폭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는 초파리 연구소에서 일한 뒤 알 수 없는 질병을 얻었지만 자신을 ‘여성, 아내, 엄마’가 아닌 곳으로 만들어줬던 연구소를 원망하지 못한다. 집에서나 연구소에서나 그는 ‘돌봄’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으나, 그는 ‘초파리 기르기’라는 새 임무에 만족했던 것이다. 주어진 역할극에 충실했다 한들, 이 삶을 ‘아무것’이라 폄하할 순 없다. 역할과 진심과 최선이 엉겨붙은 기묘한 총체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다.

작가는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라는 색다른 단편을 통해, 책에 실린 7편의 단편에서 이름을 빌려온 7명의 인물을 마주하게 한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마피아 게임’ 속에서 인물들은 “소통에 불일치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를 대화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호명을 저마다 품은 채로, 우리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각자의 선택을 해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대화한다. 이것이 임솔아 작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눈송이처럼 희미한 희망이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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