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선·원색 화면에 서사의 파편들이 흐른다

노형석 2021. 12. 10.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 라이프치히 화파 대표작가
네오 라우흐·로사 로이 부부
국내 첫 초대전 내달 26일까지
네오 라우흐의 2018년 작 <프로파간다>.

인류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란인 제2차 세계대전은 서양 현대 그림의 역사에서도 끔찍한 재앙이었다. 독일의 나치즘과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가공할 군사력을 앞세우고 정면 대결해 전례 없는 규모의 인명이 살육당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그 후과로 두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 도구가 됐던 사실주의 그림, 이른바 구상미술은 전후 정치와 이념에 오염된 예술이란 비난 속에 철저히 도외시되는 처지에 놓였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잭슨 폴록의 흩뿌리는 그림으로 유명한 추상표현주의 같은 미국발 모더니즘 미술이다. 잿더미가 된 패전국 독일의 화단 현실은 더욱 엄혹했다. 전후 30여년간은 나치즘 회화의 망령에 대한 공포에서 사실적인 구상회화를 그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네오 라우흐의 2010년 작 <베르그 페스트>.

1989년 독일 통일 이후 옛 동독의 고도 라이프치히에서 배우고 작업한 일군의 사실주의 화가들이 전세계 미술계와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다. 그들이 시들했던 회화의 복권을 일궈낸 것은 전후 서구 회화의 역사에서 보면 기가 막힌 반전이다. 팀 아이텔, 네오 라우흐, 틸로 바움게르텔, 마티아스 바이셔 등 라이프치히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리얼리즘 미술교육을 받으며 작업 기반을 삼은 소장 작가들이 그 주역이다. 통일 뒤 자본주의 소비사회로 편입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에 직면하자 거꾸로 자신들이 배운 리얼리즘 화법으로 서구 미술계를 강타했다. 동독 예술가의 내면과 모순된 현실을 신화와 초현실적 이미지, 현실의 군상들이 정련된 붓질 속에 묘사하며 모호한 화면으로 드러냈는데, 이런 그림들이 전세계 컬렉터와 미술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지난 10월25일 서울 스페이스 케이의 전시 설명회에 나온 부부 작가 네오 라우흐(오른쪽)와 로자 로이. 손을 잡고 자신들의 작품 앞에 서 있다.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작가 네오 라우흐와 그의 부인 로자 로이가 서울 가양동 스페이스 케이에서 열고 있는 국내 첫 초대전 ‘경계에 핀 꽃’은 이런 역사적 맥락 아래 그린 두 작가의 근작들을 만나는 자리다. 네오 라우흐는 1990년대 이후 사회 현실과 작가적 환상, 우화, 신화 등이 결합된 몽상적이고 불길한 그림들로 내리막길 걷던 구상회화를 새롭게 복권시키고 세계 미술계에 선풍을 일으킨 작가다. 강렬한 선과 원색의 색조가 어울린 화면에 일상과 역사적 사건, 신화의 서사들이 파편적 이미지들로 섞이면서 흘러다니는 서사적 구성은 이른바 ‘네오 라우흐 스타일’로 불리는 그만의 특징적 화풍이다. 전시장에는 21세기 세계 미술계에 회화의 선풍을 다시 일으킨 거장적 풍모를 빼어난 회화적 역량으로 여실히 보여주는 대작들이 상당수 나왔다. <악한 환자> <프로파간다> <베르그 페스트> 등 대작들은 명확한 사실적 회화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그로테스크한 구도와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이미지들로 지극히 예민한 화면 속에 한가득 놓여 있다. 중세·근세 시대, 현대에 걸쳐 다양한 복식을 한 인물 군상들이 석양이나 여명을 맞는 바로크 회화풍의 광막한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등장해 미지의 행동과 의식을 벌이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을 부리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쌍둥이 혹은 작가와 닮은 주인공이 등장해 뜻 모를 행동을 하는 장면들을 담은 부인 로자 로이의 소품들도 흥미롭다. 그 또한 여성적 주체성과 시선, 사람들 간 대화의 구도를 담은 독특한 회화로 국제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작가다. 역사와 신화, 현실의 파편화된 단상들을 화폭에 가져와 극도로 예민하고 정련된 붓질로 펼쳐놓는 남편과 달리 로자 로이는 단호한 선묘로 되풀이되는 여성 군상의 이미지들을 통해 또 다른 개성을 펼친다는 점이 견줘 보는 재미를 안겨준다. 서로 ‘핑퐁게임’ 하듯 각자의 이미지를 번갈아 그려 넣으며 작업한 공동 작업 <경계>도 볼 수 있다.

스페이스 케이 전시장. 네오 라우흐의 대작들이 걸려 있다.

지난 10월25일 전시장에 부인과 함께 나온 네오 라우흐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슬로건과 잡음으로 둘러싸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제게 페인팅, 회화는 가치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시대에서 안정감을 주고 우리 자신의 중심으로 이끄는 표지판이지요. 이 시대 회화가 지닌 임무이자 꿈입니다. 그 꿈을 전달하는 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 1월26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