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상품으로 표류하는 문해력

한겨레 2021. 12.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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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호기심에 2022학년도 수능 국어 비문학 지문을 들여다봤다.

수능 국어가 어려워지면서 최근 '문해력'이란 단어가 자주 들린다.

수능 연계 교재를 만드는 'EBS'가 어려워진 수능 국어의 관건으로 여겨지는 '문해력'을 다루고 있다 하니, 학부모와 학생들은 믿고 혹할 수밖에.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문해력(文解力). 하지만 최근 수능 국어 비문학 문제를 보면 문해력만으로 풀 수 없는 지문들이 제법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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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당신의 문해력: 공부의 기초체력을 키워주는 힘

김윤정 지음 l EBS BOOKS(2021)

나름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호기심에 2022학년도 수능 국어 비문학 지문을 들여다봤다. 대표적인 ‘킬러 문항’으로 꼽힌 헤겔의 미학을 주제로 한 지문과 문제. “직관의 외면성 및 예술의 객관성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각성이다.” “변증법에 충실하려면 헤겔은 철학에서 성취된 완전한 주관성이 재객관화되는 단계의 절대정신을 추가했어야 할 것이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낯설어할 만한 철학 개념과 번역 투의 문장이 어우러진 지문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천천히 지문을 읽고 나니 다행스럽게도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잠시 안도하는 사이 10번 문항에서 마주한 지문은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트리핀 딜레마’ ‘기축 통화’ ‘브레턴우즈 체제’ ‘금본위 제도’ ‘닉슨 쇼크’ 등 듣기만 해도 머리를 지끈 아프게 하는 경제용어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경제 관련 지문은 변별력을 높일 수 있어서 수능에 자주 출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해 지문은 거시경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풀기 힘든 수준이었다. 수능 출제위원들은 늘 “이전과 비교해 특별히 어렵게 출제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하지만, 앞서 예를 든 비문학 지문들은 시험장에서 시간에 쫓기는 학생들이 빠르게 읽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다.

수능 국어가 어려워지면서 최근 ‘문해력’이란 단어가 자주 들린다. 서점가에는 문해력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EBS 당신의 문해력〉(EBS BOOKS), <문해력 수업>(알에이치코리아), <공부 머리는 문해력이다>(포르체), <초등 문해력을 키우는 엄마의 비밀 1단계>(로그인), <하루 3줄 초등 문해력의 기적>(청림Life) 등, 문해력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학습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양한 문해력 관련 책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책은 〈EBS 당신의 문해력〉이다. ‘EBS’(교육방송)와 ‘문해력’을 전면에 내세운 영리한 제목의 책이다. 수능 연계 교재를 만드는 ‘EBS’가 어려워진 수능 국어의 관건으로 여겨지는 ‘문해력’을 다루고 있다 하니, 학부모와 학생들은 믿고 혹할 수밖에.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인 마케팅 전략이 드러난 이 책은 2021년 3월 총 6부작으로 방영된 EBS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재구성해 만들었다. 방영 당시 화제를 불러일으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답게, 책 출간 문의가 잇따른 것으로 알려졌고, EBS는 발 빠른 기획으로 ‘문해력’ 책을 선보였다.

〈EBS 당신의 문해력〉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문해력이 왜 중요해졌는지 알려준다. 영유아기부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에 이르기까지의 문해력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일깨워준다. 특히 디지털 키즈로 자란 엠제트(MZ)세대에게는 문해력이 미래의 경쟁력이자 권력이라고까지 부추긴다. 이에 질세라 사교육업체들은 경쟁적으로 문해력 프로그램 개발에 나서고 있고, 문해력은 최고의 사교육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문해력(文解力). 하지만 최근 수능 국어 비문학 문제를 보면 문해력만으로 풀 수 없는 지문들이 제법 많다. 수능에서 국어영역이 변별력을 높이는 과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국어가 사실상 국어가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2021년 대한민국에서 문해력은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BC에이전시 대표,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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