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의도적으로 배제된 야구, '리부팅'해야" [공 때리는 그녀들 ②]
[경향신문]
정수경·송근영씨 연구서 발간
마운드, 여성에겐 ‘금지된 자리’
시구 때 외엔 주인공으로 못 서
사회 곳곳의 ‘마운드’와 함께
과거 지우고 “껐다 켜야” 할 때
야구 규칙에 따르면 ‘마운드’는 홈플레이트에서 59피트(17.983m)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직경 18피트(5.486m)의 원으로 구성된다.
마운드의 높이는 10인치(25.4㎝)이고, 투구판으로부터 6피트(1.829m) 앞까지의 경사는 6인치(15.24㎝)로 유지한다. 야구장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신성(神聖)’을 만든다. 2010년 4월22일, 오클랜드 투수 댈러스 브레이든은 양키스 간판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파울 판정을 받아 1루에 갔다 타석으로 돌아올 때 마운드를 밟고 지나자 “투수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며 설전을 벌였다. 로드리게스는 “(투수가)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브레이든은 5월10일 등판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며 ‘신성’을 증명했다.
야구팬이라면 모두가 올라가 보고 싶은 곳이지만 모두에게 허락된 자리는 아니다. 정수경 연구자(31)는 전화 인터뷰에서 “마운드는 거꾸로 ‘금지된 자리’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했다. 여성에게 야구장의 마운드가 허락될 때는 ‘시구’를 할 때다. 다른 대부분의 상황에서 여성이 마운드에 오르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정 연구자는 “젠더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에는 누군가에게만 금지된 자리들이 있다. 사회에는 그런 ‘마운드’가 엄청나게 많다”고 말했다.
여자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 마운드가 누군가에게는 ‘신성한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금지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파리 1대학에서 미술사·건축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정수경 연구자는 파리 9대학에서 문화기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친 송근영 연구자(32)와 함께 ‘턱 괴는 여자들’(이하 턱괴녀)이라는 팀을 만들어 여자 야구에 대해 탐색하고 연구했다.
턱괴녀의 시작은 영화 <야구소녀>였다. 송 연구자의 제안으로 대중적 층위에서 역사적으로 야구를 분석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정 연구자는 “만화, 게임, 영화, 전시를 다 뒤졌는데, 야구하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턱괴녀에 따르면 현대미술 플랫폼 ‘ARTSY’에서 ‘야구’로 검색해 나온 447개 결과 중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은 겨우 7개. 1개를 빼고는 다 ‘야구 방망이를 들고 저항’하거나 ‘매릴린 먼로가 시구하는’ 이미지에 그쳤다. 축구, 배구, 농구 모두 여자 선수들이 있는데, 야구만 없었다. 정 연구자는 “역사적으로 살펴봤더니 야구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여성의 부재, 배제가 이뤄진 종목”이라고 설명한다.
메이저리그는 1952년 ‘여자 선수와의 계약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만들었고 40년이 흐른 1992년이 돼서야 이를 삭제했다. 메이저리그는 출범 이후 오랫동안 ‘백인 남성’의 영역이었고 해외 전파 과정에서도 이 같은 ‘DNA’가 함께 퍼졌다.
2019년 기준 KBO리그 관중의 48%가 여성이고 MD 상품 구매자의 70%가 여성이지만 야구장에서 여성의 위치는 관중석과 응원석(치어리더)으로 제한된다. 마운드에 서기 위해서는 ‘시구’라는 이벤트가 필요하다. 정 연구자는 “야구장에 놓인 성별의 레이어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시대와 사회의 빈틈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야구를 하는 여성’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소외됐다.
턱괴녀는 그래서 ‘여자 야구’ 연구에 들어갔다. 안향미, 김라경, 박민서 등 여자 야구 선수와 여자 야구 제도 관련 당사자들, 여자 야구 콘텐츠 관련 인물 등 모두 21명을 인터뷰했다.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살폈고, 미국 여성 대학 운동 선수의 숫자가 670%나 늘어날 수 있었던 ‘타이틀9’법의 효용과 국내 적용 가능성을 분석했다. 그 결과물이 ‘외인구단 리부팅’이라는 책으로 나온다. 지난 11월 끝난 텀블벅 클라우드 펀딩에서 ‘완판’에 성공했다. ‘외인구단 리부팅’은 12월 말에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정 연구자는 “한국에서 공식적 여자 야구팀은 ‘국가대표’밖에 없다. 제도는 없지만 필요할 때는 국가를 위해 동원되는 방식도 문제”라고 말했다. 연구집 제목 ‘외인구단 리부팅’은 말 그대로 제도 밖 외인들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여자 야구를 상징한다. 이제 과거를 싹 지우고 ‘껐다 켜야(리부팅)’ 할 때가 왔다.
턱괴녀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시대의 요구에 빠르게 반응한다. 2021년의 문화콘텐츠는 트로트, 육아, 먹방에 지쳤고, 이제 ‘운동하는 여성’으로 이동 중이다. 그동안 남학생들 차지인 ‘학교 운동장’ 역시 또 다른 ‘마운드’라고 할 수 있다. 리부팅은 시대적 요구에 가깝다. 정 연구자는 “여자 야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 사회 속 또 다른 ‘마운드’들이 드러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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