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한겨레는 편이 정해져 있잖아"
[슬기로운 기자생활]
임재우 | 젠더팀 기자
최근 한 달, 야당을 취재하고 있다. 난항을 겪던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이 울산에서 극적으로 합의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이준석 당대표가 지방을 떠돌던 때라 어수선한 상황. 직업상 어찌 됐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야 했다. 얼마 전부터 공보를 맡은 한 의원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의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겨레> 기자인데 여쭤볼 게 있다. 회신을 부탁드린다’는 메시지를 보낸 지 30여분 뒤 답장이 돌아왔다. “저는 막말이나 해대는 사람 아닌가요? ㅎㅎ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공보를 맡은 분의 전화 통화 ‘보이콧’에 어리둥절한 찰나, 회사 기사를 검색해봤다. 읽어 보니 ‘막말’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다 싶은 논란이 기사화되어 있었다. ‘<한겨레> 기자라 전화를 안 받은 건가’ 싶어 순간 발끈했지만, 이내 자신에게 불쾌한 기사를 여럿 쓴 언론사를 상대하기 싫은 마음은 좀 이해가 됐다. “나중에 인사드릴 기회 있길 바란다”고 문자를 보내고, 다른 공보 담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겨레> 기자 질문에 친절하게 답을 했다.
뜬금없지만, 이 일이 지난해 초 총선을 앞두고 한 여당 중진 의원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고 곤욕을 치르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 제기하는 의혹도 아니고 과거 검찰 수사를 통해 이미 드러난 의혹을 되짚는 수준의 기사였지만, 선거를 코앞에 둔 그 의원은 예민했다. 내게 전화를 걸어와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 시간이 넘게 해명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어와 한두 시간가량 재차 해명했다. ‘해명은 최대한 듣자’는 직업윤리를 나름 초인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한순간 ‘버튼’이 눌렸다. ‘<한겨레>가 민주당 의원한테 왜 이러냐’는 취지의 말이 들리자 갑자기 열이 올랐다. ‘<한겨레> 기자가 민주당 의원에게 그러지 않을 이유가 뭔지’ 되묻고 싶었지만,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신체 특성상 어버버하다 전화를 끊었다. 기사는 고쳐지지 않았고, 그 의원은 한달 뒤 다시 배지를 달았다. 불쾌한 말에 응수하지 못했다는 그때의 찝찝함이, ‘<한겨레> 기자’여서 보수 정당 의원에게 통화를 거부당하는 상황이 되자 불쑥 떠오른 것이다.
한 유력지는 <한겨레>를 다양하게 부른다. ‘친정부 성향 매체’라고도 하고 ‘친여 매체’라고도 한다. 간혹 민주당 내 세력까지 특정해 ‘친문 매체’라고도 지칭한다.(이건 좀 심하다 싶다.) 이런 짓궂은 네이밍에 휘둘릴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러한 악의적인 규정에도 나도 모르게 간혹 움츠러든다는 점이다. 굳이 유력지가 아니어도 ‘여당지’라는 독자의 지적, ‘<한겨레>는 어차피 편이 정해져 있지 않냐’는 어느 동료 기자의 지나가는 말이 늘 신경이 쓰인다. ‘<한겨레> 기자가 민주당 의원한테 왜 이러냐’는 말에 ‘급발진’한 것도, <한겨레> 기자라는 이유로 전화를 거부한 국민의힘 의원에게 발끈한 것도,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일종의 방어기제였을지 모른다.
가끔은 명백한 악당이 있었던, 무한정 비판을 쏟아부어도 한없이 모자라는 ‘숙적’이 있던 때에 기자를 하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하다. 필봉을 휘둘러 거악을 쓰러뜨리고, 내 편의 가치에 가장 선한 것들이 보장되어 있다는 확신이 있던 시절 말이다. 고작 ‘여당지’라는 말에 부들대는 나는 철없게도 간혹 그 시절이 ‘부럽다’고 느낀다. ‘좋았던 옛날’은 이제 훌쩍 사라졌다. 애초에 그런 투명한 선악 구분이 허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수년 전 호기롭게 적은 입사 후기에는 “생각의 선명함을 자랑하기보다는 세상사의 복잡함 앞에 겸손한 기자가 되겠다”는 어설픈 다짐이 있다. 나름 피아를 정해놓고 누구 편에서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포부였다. ‘저 거창한 다짐이 내 기사 속에서 구현되고 있을까?’ 갑자기 돌아본다. 그렇다. 입사 후기까지 뒤지게 하는 이 모든 잡념이 사실은 전화 한 통을 거부한 어떤 의원에 대한 뒤끝이다. 부디 다음에는 전화로 ‘질문’할 수 있기를.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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