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편집자 ㅊ씨

한겨레 2021. 12. 9. 18: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중간에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끝까지 따라온 독자라도 이 목록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편집자 ㅊ씨는 아마도 한 십년쯤은 더 그렇게 조용히 책장을 넘길 듯한데, 그의 그늘 여기저기에서는 또 언제나 그랬듯이 ㅊ씨를 닮은 머리 밝은 젊은 편집자들이 공부하듯 조용히 교정지를 넘기며 달라지는 세상을 편집하고 있을 것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케네스 포메란츠, 스티븐 토픽/박광식, 2003), <수량화 혁명―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앨프리드 크로스비/김병화, 2005), <더 레프트 1848∼2000―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제프 일리/유강은, 2008),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강상중, 현무암/이목, 2012), <문명과 전쟁>(아자 가트/오숙은, 이재만, 2017).

중간에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끝까지 따라온 독자라도 이 목록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책에 익숙한 독자라면 전부 번역서라는 것, 역사와 관련이 있는 무거운 책이라는 것, 왠지 두께가 만만치 않을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실제로 두 권은 천 쪽이 넘는다) 정도까지는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책들이 한 편집자가 기획하거나 편집한 책이라는 사실까지 간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편집자의 자리에서 책을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 저자, 또는 출판사, 또는 표지 디자이너, 그리고 가끔은 과분하게도 번역자를 중심에 두고 이 생산물을 바라보지, 책 만드는 일의 중심에 있는 편집자에게 눈길을 주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인지 편집자의 이름조차 다른 이름들과는 달리 책의 맨 뒤에 조용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위의 책들을 편집한 ㅊ씨는 실제로도 예리한 편집 지성을 남쪽 토종스러운 외모 안에 감춘 채 출판계 한 모퉁이에서 삼십여년을 조용히 살아왔고, 변함없이 교정지를 살피다 환갑을 맞아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출판사에서 정년퇴직했다. 심지어 ㅊ씨는 최근 오랫동안 출판 외길을 걸어온 공로로 준 뜻깊은 상마저 감염병 상황 때문에 조용하게 받았다. 내가 ㅊ씨의 수상 소식을 전한 매체를 일삼아 꼽아보았는데 한 손으로 충분했다.

그렇다고 ㅊ씨가 서운해한다는 뜻도 아니고, 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의 조촐한 축하 자리마저 없었다는 뜻도 아닌데, 그 자리에서 그는 사실 외길을 걸은 것은 아니고 잠깐 외도를 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오래전 광화문 어딘가에 문사철(文史哲)의 앞 두 자를 딴 문사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차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창밖을 보며 한숨만 쉬다 곧 접고 말았지만. 그런데 좀 이상하다. 출판 외길을 걸은 공로를 말하는데 잠깐이나마 출판사를 차린 일을 외도로 치다니. 그러니까 그에게 출판 외길이란 곧 편집 외길이고, 출판사를 차린 것은 평생 글만 읽기로 작정한 선비가 벼슬을 탐한 것과 비슷한 일이 되는 걸까? 그 순간 나는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처음 ㅊ씨를 만났음에도 거의 첫눈에 반한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이런 서생스러운 면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세상모르고 어리바리하단 말일까? 위의 책 목록(그가 손댄 책 수백권 가운데 기억에 강하게 남는 다섯권을 꼽아보라는 기습적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의 제목을 다시 훑어보고, 그가 민청련(기억하는가?) 기관지에서 편집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도 떠올려보고, 짧은 외도마저 문사라는 이름으로 했다는 점을 보태보면, 조용히 살아온 이 편집 서생의 삶이 끊이지 않고 한 획으로 진하게 이어지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게 또 내가 ㅊ씨에게 계속 반하고 있는 이유인 듯하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캐물을 건 없겠지만, 편집으로 세상을 거두고, 또 거꾸로 조용히 세상을 편집해보겠다는 젊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리라. 편집자 ㅊ씨는 아마도 한 십년쯤은 더 그렇게 조용히 책장을 넘길 듯한데, 그의 그늘 여기저기에서는 또 언제나 그랬듯이 ㅊ씨를 닮은 머리 밝은 젊은 편집자들이 공부하듯 조용히 교정지를 넘기며 달라지는 세상을 편집하고 있을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