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 당하지 않기' 위한 삶, 지금 괜찮은가요? 질문 던지는 연극 '김수정입니다'

선명수 기자 2021. 12. 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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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7일부터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김수정입니다>의 한 장면. 연말 시상식장처럼 꾸며진 무대에서 배우들은 레드카펫과 관객석인 원형 탁자를 오가며 연기한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김수정입니다>는 여러모로 독특한 연극이다. 일단 극의 제목 속 ‘김수정’은 극단 신세계의 대표이자 이 공연 연출의 이름, 바로 그 김수정이다. 배우들은 물론 연출도 본인의 이름으로 공연에 출연한다. 무대 역시 독특하다. 공연장 양 끝에 설치된 두 개의 작은 무대를 긴 레드카펫으로 연결하고, 그 주변으로 작은 조명이 놓인 원형 탁자가 곳곳에 배치됐다. 연말 시상식장, 혹은 결혼식장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7일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이 연극은 <생활풍경> <별들의 전쟁> 등 올해 신세계가 선보여온 최근작들과 마찬가지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관객은 레드카펫을 둘러싼 원형 탁자로 자리를 안내 받고, 공연 중간중간 배우들도 이곳에서 연기한다. 연극이 시작되면 화려한 옷을 입은 두 명의 사회자가 레드카펫에 올라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을 알린다. 이제 이곳은 ‘DAC(두산아트센터) 아티스트’로서 김수정의 마지막 공연을 축하하는 연회장이 된다. 관객 역시 이 연회에 초청됐다. 김수정이 이끄는 극단 신세계의 배우들은 김수정의 동료이자 자기 자신으로 출연해 김수정의 39년 삶을 들여다 본다.

다소 과장스러울 정도로 들떠 있는 파티 분위기는 드레스를 차려 입은 파티의 주인공, ‘김수정’의 인터뷰 이후 급변한다. 왜 이 공연을 하게 됐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답한다. “연극이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이 사회에서 실격 당하지 않기 위해 연극을 해왔습니다 … 그래서 토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가장 내밀한 삶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지난 7일부터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김수정입니다>의 한 장면. 두산아트센터 제공
극단 신세계의 김수정 연출(오른쪽)은 연극 <김수정입니다>의 배우로 이 극에 직접 출연한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연출이자 배우인 그의 말처럼, 이 연극은 사회에서 “실격 당하지 않기 위해” 분투해온 한 개인의 이야기이자 그 사회의 무수한 폭력 속에서 “불편해서 외면했던 나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술가인 척, 모범적인 척, 괜찮은 척”하며 살아왔다는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척’하는 연극” 안에 살아온 것이라고 말한다.

<파란나라> <이갈리아의 딸들> <공주(孔主)들> 등 우리 안의 전체주의, 젠더 폭력과 같은 사회의 고질적 모순을 다룬 연극을 주로 선보여온 김수정 연출은 이번 작품에선 개인 서사에 집중해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본다. 사회적 담론 역시 개인에서 출발한다는 문제의식이었고, 그 시작은 연출 자신인 ‘김수정’이었다고 한다. 연극은 동시에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관객 모두에게 타인으로부터 ‘실격 당하지 않기 위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난 6일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난 김 연출은 “그동안 사회적 담론 뒤에 숨어 있던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나는 왜 연극을 만들고 있나’라는 질문이 생겼고, ‘척하는 연극’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이번 작품은 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 안의 불편함과 마주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 자신의 서사 안에도 굉장히 많은 폭력 담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공주들> 같은 지난 작품들 역시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데, 누군가의 개인사에 녹아 있는 사회적 담론을 이야기한다는 차원에선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극단 신세계의 김수정 연출. 두산아트센터 제공


연출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연극인 만큼, 이 극에서 현실과 무대의 경계는 희미하다. 이 연극은 실제 두산아트센터의 젊은 예술가 후원 프로그램인 ‘DAC 아티스트’로서 그의 마지막 공연이기도 하고, 김수정의 가까운 동료이기도 한 배우들은 그의 어린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파헤치다시피 추적한다. 그의 어린시절 사진부터 일기장, 학교 생활기록부, 가족과 친구의 증언 영상도 공연 중 스크린을 통해 상영된다. 연극계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자신의 이야기, 각종 상을 휩쓸며 연극계에서 주목받은 극단 내부의 속사정과 갈등도 꺼내놓는다.

연극은 대부분 발랄한 톤으로 전개된다. 배우들은 수시로 춤을 추고 노래하며, 김수정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연극과 결혼식을 올리는가 하면, 관객을 상대로 한 즉석 경매를 하는 등 B급 유머도 수시로 터져나온다. 그 발랄함 속에서도 성폭력 생존자로, 또 ‘실격 당하기 위한’ 개인으로 발화하기까지 거쳤을 분투가 짐작될 수밖에 없다. 김 연출은 자신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꺼내놓기까지 “공연을 하기로 해놓고도 수차례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 보면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나만 겪는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제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이지만 어떤 예술가가 아니라 ‘사람 김수정’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고, 저희는 이 무대가 끝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준비했다”고 했다.

공연은 “실격 당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뎌 보겠다”는 그의 선언으로 끝맺는다.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기 시작한 그 여정을 응원하게 되면서, 관객 스스로도 불편해서 꺼려왔던 각자의 질문들을 돌아보게 하는 여운을 남기는 연극이다.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25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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