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연은 '피해자'에 미달하는가

안영춘 2021. 12. 9. 15: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침햇발][아침햇발]
조동연 더불어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 브리핑룸에서 열린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인선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생활 논란’을 벌이고 ‘거짓에 기초한 가정 구성이나 삶의 태도’라고 문제 삼는 세태야말로 가부장제 사회의 케케묵은 자화상 아닌가.

그가 현실정치의 중책을 맡을 자격을 갖췄는지와 그가 당하는 폭력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는 다만 젠더 폭력의 피해자다.

안영춘 | 논설위원

“민주당 이재명 캠프의 공동상임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된 조동연 교수가 ‘사생활 논란’(홑따옴표 필자 첨가)으로 문제가 불거지자 어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생활 논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거짓에 기초한 가정 구성이나 삶의 태도’(〃)는 성별을 떠나 문제가 있다.”

현실 정치권 안에서 젠더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지난 3일 발표한 입장문의 첫 단락이다. 나는 저 문장 앞에서 몇날 며칠 배회했다. 몇번을 읽고 또 읽었다. 물론 입장문의 취지는 조동연을 비판하는 데 있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는 데 있었다. 셋째 단락부터 입장문의 문제의식은 확연해진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조동연 사태’(〃)의 원인을 조동연 개인이 아닌 민주당에서 찾는다. 흔히 정당은 문지기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국민에게 검증된 사람과 정책을 선보이고, ‘문제 있는 인물’(〃)과 공약은 정당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마음이 급한 민주당이 졸속으로 외부 엘리트들을 영입해…(후략)”

그러나 첫 단락의 전제는 여기서도 오롯하다. 조동연은 이 사태의 주역(‘조동연 사태’)이다. 정치권에 발을 들이기 전 마땅히 걸러졌어야 할 자격 미달의 인물이다. 아이가 혼외자인 걸 ‘법률상 배우자’에게 감췄는데, 법률적 관계가 청산된 뒤 ‘전 배우자’에 의해 뒤늦게 들춰졌다. 저 입장문이 나오기 전 내가 ‘가로세로연구소’의 유튜브와 <티브이(TV)조선> 등을 통해 원치 않게 인지한 오래전 사실관계의 전부다. 그걸 두고 ‘사생활 논란’을 벌이고 ‘거짓에 기초한 가정 구성이나 삶의 태도’라고 문제 삼는 세태야말로 가부장제 사회의 케케묵은 자화상 아닌가.

이것은 여성정치네트워크뿐 아니라 우리 사회 진보 세력이 그 심각성에 동의할뿐더러 줄기차게 맞서 싸워온 문제라고 알고 있다. 돌아보면 나는 수업 진도 못 따라가는 학생처럼, 때로 회의하고 때로 찜부럭 내면서도, 그 문제의식에 견인돼왔다. 그래서 저 입장문 앞에서 배회했는지 모른다. 여성정치네트워크는 내가 모르는 그의 반인륜적 행위라도 알고 있지 않은가 싶을 지경이었다.

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튿날 다시 입장문을 냈다. 조동연 개인을 향한 비판의 맥락은 지워졌다. 말미에는 ‘표현상 달리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여, 후속 논평으로 작성하였다’고 추신이 붙었다. 가로세로연구소가 실명 비판에 추가됐다. 민주당에 대한 비판은 문제적 인물을 거르지 못한 데서 “무책임한 발뺌 정치”로 이동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라는 거였다. 꼭 그만큼 조동연은 무구해졌고, 그의 피해자성도 선명해졌다. 하지만 ‘조동연 사태’와 달리 ‘피해자 조동연’은 끝내 주어 위치에 서지 못했다.

근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젠더 폭력 피해자들의 경우 피해자가 주어인 서사가 구성되고는 했다. 서사는 젠더 운동 안에서 활발히 생성·유통돼, 운동의 범주 밖으로 확산했다. 고 변희수 하사가 떠오른다. 누구보다 군을 사랑했고, 반젠더적 군사주의 문화를 초극하고자 하는 노력을 다하다 마침내 희생된 사람. 그렇기에 ‘군’이라는 기표는 병역거부 운동을 펴는 이들에게도 애도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애도를 거쳐 비로소 변희수의 이름으로 군의 만행을 규탄할 수 있었다.

조동연의 서사는 왜 구성되지 못하는가. 생물학적 사망에 이르지 않아서인가. 자신과 혈육이 인격적 죽임을 당한 걸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변 하사와 달리 엘리트 코스만 걸었고, 그 연장선에서 현실정치 상층부로의 편입을 노려서인가. 별의별 잡생각을 다 하는 내 모습에 문득 도리질 치면서도, 이 미욱한 질문을 붙들 수밖에 없다. 그는 피해자로서 자격 미달인가. 그의 피해자성을 후순위로 부차화한 채 남성주의 기성 정치를 공략할 수는 있는가.

조동연이 성폭행 피해 생존자이고, 혼외자의 출생 또한 그 피해와 직접 닿아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 뒤로 사회 분위기의 변화가 감지된다. 그러나 여전히 신중한 과묵이 느껴진다. 그사이 성폭행 피해자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살해하는 어느 나라의 ‘명예살인’을 빼닮은 가부장적 가해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가 현실정치의 중책을 맡을 자격을 갖췄는지와 그가 당하는 폭력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는 다만 젠더 폭력의 현존하는 피해자다.

조동연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는 문제를 두고 가족, 특히 어린 아들과 뜻을 모으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출생 과정에 대한 가부장적 해석을 초극하고 출생 이후의 현존에 집중하는 그들 모습은 사뭇 큰 울림을 일으킨다. 그들만의 힘은 아니다. 그들은 달걀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젠더 폭력과의 싸움에 부단히 헌신해온 이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jon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